“문득 먼데 하늘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주섬주섬 배낭을 꾸린다
허둥거리는 시간을 하나씩 잡아 포개어 넣고
끈을 조이고 나면 긴장의 등짐 하나
나를 밖으로 떠다민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산에 들면서부터
숲이 내 키를 높여주면서부터
길들은 눈 크게 떠 손을 내민다
초록 옷 입은 길들의 몸을 따라가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할 일
그대로 두어 잠들게 하고
참을 수 없는 사연들
저절로 물 흘러 떠내려가느니”
-이성부 ‘길이 나를 깨운다’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 산길 풀섶마다 / 옛적 어머니 웃음빛 닮은 것들 /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지천 듣고 / 고개만 숙이시더니 / 정재 한구석 뒷모습 /
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년 만에 뵙는 / 어머니 웃음빛 /
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이성부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개천절을 포함한 추석연휴가 지나고 한글날 연휴가 오기 전에 서둘러 짐을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태어나서10월 초순 평일에 지리산을 오르기는 아마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8년부터 지리산을 매년 오게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동, 남원, 구례 쪽에서 지리산을 다녀갔으며, 앞으로 함양과 산청으로 접근해볼 계획입니다.
평일에 고요한 지리산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화중지복禍中之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80년 대학 1학년 시절 5.18 휴교령이 떨어져 방황하던 무렵 여름방학에 교회 친구들과 지리산 화엄사를 지나 노고단에 오른 지가 벌써 40년 전이네요. 참 세월은 무심하게 흐릅니다.
연휴 직후인데다 코로나로 인해 인적이 드물어 지리산은 고적하기가 그야말로 ‘적막강산寂寞江山’이었습니다. 하늘은 높고 깊게 푸르렀지요. 그 동안 분주했던 삶이 참으로 황량해보였습니다. 어찌 그리 살았는지요.
첫날은 몸을 풀겸해서 지리산에서 가장 편안한 등산로로 잘 알려진 성삼재(1102m)에서 노고단(1507m)을 오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성삼재까지는 천년고찰 천은사를 지나 차로 갈 수 있어 이미 1000미터 정도는 오른 셈입니다. 성삼재 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는 길은 넓고 편한 길이어서 휠체어 타고도 갈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로 지리산에서는 가장 편하고 대중적인 등산로입니다.
그러나 어느 등산객은 이코스를 다녀와서 “누가 쉽다고 했어?”라고 투덜댈 정도로 등산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요. 1시간쯤 울창한 숲의 터널로 펼쳐진 편안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중간에 이정표와 함께 갈림길이 나옵니다. 오던 길처럼 넓고 편한 길을 따라 산을 한 바퀴 돌아서 편안하게 정상에 오르는 길과 그곳부터는 직선거리로 빠르게 바윗길과 계단으로 이어진 제법 힘든 길이 있습니다.
산행의 목적이 빨리 완주하는 것이 아니라면, 넓고 편안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멀리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풍광을 볼 수 있는 ‘무넹기’(물을 넘긴다)를 경유합니다. 대부분 노고단 등반객들은 정상을 향해서 가느라 이곳을 그냥 스쳐지나기 십상인데요. 그러시면 노고단 고개에서 볼 수 있는 섬진강의 푸르른 물줄기를 놓치시게 됩니다. 오르내리는 길 가운데 한 번은 멀리 내려보이는 지리산 자락 마을 풍경과 섬진강을 꼬옥 보시기 바랍니다. 내려오는 길을 편안한 길을 따라 오시면 만나게 됩니다. 저도 그 길을 따라 풀섶마다, 들꽃들이 반겨주는 편안한 길을 택해서 말 그대로 ‘편안하게’ 내려왔습니다.
노고단 기슭에는 오래된 역사가 하나 서려있습니다. 노고단에서 남원 뱀사골을 가는 길에 계곡 옆 평지 작은 마을 달궁이 있습니다. 한 때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 남부군의 사령부가 주둔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 달궁과 정령치, 황령재, 팔랑재 그리고 성삼재는 하나의 고리처럼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달의 궁전’이라는 신비한 이름을 가진 달궁(達宮)은 고대 마한의 피란도성이 있던 곳으로서 마한의 효왕(孝王)이 진한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온 처지라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천연 철옹성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떨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의 장군을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훗날 정령치와 황령재가 되었으며, 또 다른 능선인 팔랑재엔 8명의 장수를 배치했고 성삼재(姓三峙)에는 성이 다른 3명의 장수를 두어 외세침략에 대응했다고 합니다. 3인의 장수를 둔 것은 서로 견제토록 해 달궁 왕조의 안위를 도모한 전략이라고 하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나 봅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 광화문에 차벽으로 쌓아올린 ‘재인산성’을 보면 ‘달궁’에 은신해 있는 마한 효왕의 두려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에서 노고단의 하늘은 “하늘을 있는 대로 다 열어주고는, 그 넓은 하늘에 해가 그려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황홀한 그림을 남김없이 보여”준다고도 했지요. 누군가는 노고단을 가르켜 “하늘과 가까운 꽃밭”이라고도 했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 가면 섬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노고단에서 구름 사이로 보이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은 그야말로 구름바다에 떠있는 섬들이라 할 정도로 가히 지리10경 가운데 하나‘노고운해’입니다. 위 사진들을 보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리산하면 뭐니뭐니해도 생각나는 사람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1985), 앞서 언급한 조정래의 <태백산맥>(1989), 그리고 이성부의 시집 <지리산>(2001)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산행시인 이성부 선생의 글은 지리산을 몸으로 직접 포월한 경험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2년 고희의 나이에 간암으로 별세한 그는 ‘봄’의 시인, ‘백제행’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에게 ‘산’은 시작활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무대였습니다. 실제로 서울 모래내 근처에 살면서 북한산을 한 달에 세 번 이상씩 오르내릴 정도로 산을 좋아했습니다. 1980년대 산을 오르기 시작한 후로 근 25여 년 동안 북한산 등반만 1000여 회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분단으로 두동강난 백두대간을 우리 민족의 기상이 발원한 지리산 천왕봉에서 부터 설악산을 지나 진부령까지 종주한 산악시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종주하면서 시집 <지리산>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를 연이어 발표합니다. 그는 심지어 태백산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이라고 고쳐불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산세에 대해서 전문적 경험자입니다.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곧 우리의 역사와 삶의 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성찰하고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가 붙고 일련번호가 매겨진 연작시 형식의 시로서 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산이라는 것은 오를 때마다 새롭고 오래 다닐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이, 오래 쓸수록 과연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시의 세계와 비슷하다”면서 “글쓰기와 책읽기를 하면서 걷기를 통해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느리게 걸어가는 연습을 하고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노고단에 관한 시에서 그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품으로 비유하면서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는 노고단의 풀섶과 풀꽃을 어머니의 환한 미소와 섬섬옥수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그는 노고단에 오르니 문득 어머니가 떠올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하지요.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 / 산길 풀섶마다 / 옛적 어머니 웃음빛 닮은 것들 / 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 내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지천 듣고 / 고개만 숙이시더니 / 정재 한구석 뒷모습 / 흐느껴 눈물만 감추시더니 / 오늘은 돌아가신 지 삼십여년 만에 뵙는 / 어머니 웃음빛 / 이리 환하게 풀꽃으로 피어 나를 또 울리느니!” 저도 40년만에 노고단에 올라서 이 시를 떠올리니 작년 여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한 웃음빛이 저를 울리네요.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고 뽐내지 말거라
이기고 나서 떠들거나 으스대지 말거라
이마를 쳐들고 콧대를 세워
내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산다고 여기지 말거라
혼자서 솟아 외로움을 만들지 말거라
무너지면 모두 이렇게 팍팍하게 된다
허물어져서 모두 마음 맞추기 어려운 사막이 된다
아름다움에 승리에 푸른 하늘에
사랑이 핥고 가는 부끄러운 떨림에
굶주린 검은 아가리가 된다”
-이성부 ‘너덜겅’
그리고 그는 초가을 산에 오르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초가을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니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이 쳐다보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가/ 그 좋은 사람 때문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이성부 산문집 <산길>에서
“모든 산길은 조금씩 위를 향해 흘러간다
올라갈수록 무게를 더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그 사람이 잠 못 이루던 소외의 몸부림 속으로
그 사람의 생애가 파인 주름살 속으로”
길을 걷다보면, 길이 저를 깨웁니다. “그대로 두어 잠들게 하고, 참을 수 없는 사연들 저절로 물 흘러 떠내려가느니” 길이 저를 깨웁니다.
결국 시인은 혼자 산에 가면서도 혼자가 아님을 거듭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독한 산행의 외로움이 얻어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빛은 자유와 야성과 희망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이 만든 바람이 고독한 그를 떼밀어 그의 발걸음으로 하여금 자유와 야성과 희망을 품게함으로써 그토록 쉽게 길을 찾게 하고 그의 외로움이 마침내 넉넉하게 시(詩)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는
“삶이 주는 어려움의 농도가 짙을수록 사람은 더 치열해진다”
고 했습니다.
그는 그 치열함으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짐승은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갈지 몰라도, 정신의 먹이를 찾아 산에 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도를 높여갈수록 정신은 더 풍요해지고 맑아진다. 이 일에는 또한 관중이 없고 박수소리가 안 들린다. 자유와 고독과 야성을 찾아가려는 이 행위야말로 나의 시가 가야 하는 길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결국 이성부 시인에게 지리산 산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이 그의 시가 가야할 길인 것입니다. 그는 그의 시가 가야할 ‘산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 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시집 《지리산》(2001)
그래서 저도 시인처럼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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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 꽃피는 짐승들이 사는 피아골에 들어갈 볼 예정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은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단풍을 본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마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 깊은 곳에 어떤 사람들이 흘러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빈 산골짜기로 올라와서
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쌓고 땅을 고르고
마침내 씨앗 뿌려 질긴 목숨 끌어갔음을 본다
참으로 사람이야말로 꽃피는 짐승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
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 ... “
-이성부, ‘피아골 다랑이논’
지리산 산청군 산천재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시다 지리산의 별이 된 남명 조식 선생은 “피아골의 단풍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조선의 단풍을 본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