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1인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외로움이 질병 수준에 이르렀고 급기야 영국은 2018년 ‘외로움 장관(minister of loneliness)’을 임명하는 등 국가가 외로움을 관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도 50대 ‘고독사’와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청년세대에도 혼밥, 혼술, 혼여, 혼라이프 등 ‘일코노미(1conomy)’와 ‘언택트(untact)’문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가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 핸드폰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 속에 ‘고독을 잃어버린 삶’을 살면서 외로움이 심한 우울증으로 발전하면서 자살과 폭력으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건강한 고독이 없는 소통의 단절과 의미없는 외로운 삶이 최근 ‘설리’와 ‘구하라’와 같은 연예인들의 자살과 직무상 책임에 힘겨워 끝내 버티지 못한 기업인들과 공직자들, 그리고 경제적 고립을 극복하지 못한 성북동과 인천의 일가족 등의 자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외로움은 집단적으로 정치적으로 양극화를 초래하여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화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 메아리를 듣는 애코챔버(Echo Chamber)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시대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고독하고 외로운 삶’은 ‘새로운 일상적 삶(new normal)’이 되고 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 연구소(고독서원; Center for Solitude and Loneliness)은 시민들의 독서와 사유, 토론과 대화, 봉사와 참여를 통해서 시민고독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사회적 질병으로서 외로움의 문제를 치유하고, 일상적 삶의 양태로서 고독과 외로움을 건강한 사유와 창조 그리고 새로운 관계형성을 위한 긍정적 존재 양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개인의 홀로서기와 공감과 포용을 통한 지속가능한 민주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냉철한 비판과 따뜻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조병화, ‘고독하는 것은’
“고독이 때로는 최상의 사회다.
Solitude sometimes is best society.”
-존 밀튼, <실락원>
John Milton,Paradise Lost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0세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명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고독은 홀로 있기를 당당히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더 날카롭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픽테투스(Epictetus)와 캐토(Cato)와 같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아렌트는 인간은 고독할 때가 가장 덜 외로울 뿐 아니라, 홀로 있다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떠나서 절대적 자립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녀에게, 외로운 사람이란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적대적 사람들 속에 둘려쌓여 있을 때, 스스로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독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으로서, 세계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화를 통해서 세계와의 관계를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자신과 대화하는 것은 바로 ‘사유’ 혹은 ‘생각하기’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사유 혹은 생각하기란 고독 속에서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의미하는 둘 속에 하나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대화를 통해서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징요. 따라서 고독이란 것은 한 몸 속에 두 개의 존재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독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코 다른 그 어떤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단하나의 존재로서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으며, 고독한 사람들을 인류라고 하는 사해동포로 다시 만들어 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아래 한나 아렌트의 원문을 첨부합니다.)
“고독은 정직하다.
고독은 신(神)을 만들지 않고,
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
부풀지 않는다.
고독은 자유다.
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
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
목적 위의 목적이다.”
-김현승(1913-1975), ‘고독한 이유’
참고자료:
1. https://news.v.daum.net/v/20191221165608719
2. https://news.v.daum.net/v/20180118010113210
3.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51208010001548
4. https://news.v.daum.net/v/20200601135940810
5. https://news.v.daum.net/v/20200525100108272
6. https://news.v.daum.net/v/20200618144400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