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우리들의 시간>
설악산 울산바위가 바로 보이는 곳에서 첫날을 유하고 다음날 동해안으로 내려가 관동팔경 가운데 한 곳인 청간정과 해파랑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숙소인 용평에서 다시 1박을 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원주와 문막사이에 위치한 “그물과 물고기”라는 아주 오래된 자연 한정식집에서 인삼막걸리와 대나무통밥에 각종 자연의 산나물들을 겯들여 점심을 했습니다.
음식은 자연건강식으로 일품이였지만, 제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한쪽 벽면에 자리한 작은 서가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서가가 있는 곳에 가면 가만히 진열된 책들을 살펴보다 눈에 띠는 제목의 책을 뽑아들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나의 서재를 정리하며(Unpacking My Library)”에서 책장에 진열된 책을 뽑아 읽어주는 것은 감옥에 갇힌 영혼에게 자유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책을 읽는 순간은 저자의 해방된 영혼이 제 안으로 들어오는 영혼의 재탄생 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책꽂이에 갇혀있는 책들을 살펴보다가 우리에게는 <토지>라는 대하소설로 잘 알려진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표지에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라는 싯구가 크게 적혀있었습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시고 있었지요.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는 싯구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시간이 너무 아깝”게 지나가고 있으며 더구나 인생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는데 어제 저녁 먹으며 나눈 ‘시간’에 관한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걷기를 무척 좋아해서 만난 사람들끼리 설악산이 보이는 청간정 해파랑길을 걷고 아야진에서 가리비 구이와 소주 한 잔을 한 뒤, 숙소에 도착하니, 일행 가운데 제일 연배가 있으신 선배께서 서울서 내려 오는 길에 ‘우리들의 시간’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셨다고 하시면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고 있으니 앞으로 가능한 행복하고 보람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서로 다짐했다고 이야기를 꺼내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조금 늦춰보자는 마음의 소망이겠지요. 이 말을 들으니 문득 몇해 전 의미있게 보았던 조쉬 분(Josh Boone)감독의 영화 <안녕, 헤이즐 the Fault in Our Stars>(2014)이란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의식은 흐르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미국 소설가 존 그린(John Green)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문학영화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녕, 헤이즐>이란 관객 친화적인 제목으로 개봉되었지요.
이 영화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각자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방년 20살이 되기도 전에 불치의 병으로 암투병 중에 교회 암환자 심리치료교실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감지한 남자주인공 어거스티스(안셀 엘 고트)는 여주인공 헤이즐(쉐일린 우들리)에게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하고 장례식 예행연습에 초대합니다.
헤이즐은 죽어가는 남친 거스를 앞에 두고 비록 서로 사랑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주지도 못할 지라도, “어떤 무한대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무한대보다 클 수 있다Some infinities are bigger than other infinities”는 수학의 상대적 무한대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남자친구 거스가 “짧은 시간 안에 영원한 사랑을 주었으므로 You gave me forever within the numbered days” 그들의 사랑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 깊고 행복했음을 고백합니다. 다음은 여주인공 헤이즐이 숫자의 역설을 통해 사랑의 크기를 표현한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수학으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요. 놀랍습니다. 함께 읽으실께요.
산수에서 0과 1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도 있고 0.112 도 있고 ..
그 외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물론, 0과 2사이라든가 0과 백만 사이에는 더 큰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어떠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 보다 더 크지요.
저희가 예전에 좋아 했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 줬죠..
전 제게 주어진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를 원하고
거스에게도
제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길 바래요
하지만 거스, 내 사랑,
우리에게 주어졌던 작은 무한대가 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There are infinite numbers between 0 and 1. There's .1 and .12 and .112 and an infinite collection of others.
Of course, there is a bigger infinite set of numbers between 0 and 2, or between 0 and a million.
Some infinities are bigger than other infinities.
A writer we used to like taught us that. There are days, many of them, when I resent the size of my unbounded set.
I want more numbers than I'm likely to get, and God, I want more numbers for Augustus Waters than he got.
But, Gus, my love, I cannot tell you how thankful I am for our little infinity.
I wouldn't trade it for the world. You gave me a forever within the numbered days, and I'm grateful.
<안녕, 헤이즐>
이 장례식 예행연습이 있은 후 8일 뒤에 우리의 ‘거스’는 심장에 암이 전이되어 죽습니다. 그리고 그는 헤이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깁니다. “살아가면서 상처받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한테 상처를 받을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너를 선택했지. 그래서 너무 좋다. 너도 그렇기를 바래, 그렇지?” 헤이즐은 이 편지를 읽고 나서 하늘의 별을 보고 “오케이” 나도 너를 사랑해서 행복했어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비록 서로 사랑했던 남자 주인공이 죽고, 여자 주인공 역시 곧 죽어가지만 저에게는 결코 슬픈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기쁨의 영화라고나 할까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성탄절 이브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 한 적이 있고, 4학년때 시골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 친구와 겨울등산하다가 벼랑에 미끄러져 죽을 뻔 하기도 하였지요. 또한 지금까지 제가 알지 못한 채 지나간 수많은 죽음의 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온 삶이 그렇듯이 앞으로 남은 삶에도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일상에는 전쟁같은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법이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이란 인간의 존엄한 책무”(폴 오스터)임에도 말입니다.
올해는 6.25 70주년입니다. 6.25하면 우리 문학의 보배, 최인훈 선생님의 <광장>이 생각납니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은혜는 포성이 들리는 낙동강 전선 어느 산골 동굴에서 사랑하는 이명준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옷깃을 여미며 이렇게 태연하게 말합니다. 명준씨 우리 “죽기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네?” 그러나 은혜는 부지런히 만나자던 그 다짐을 아주 어기고 맙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다음날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 단 하나 유일한 문학비평가 김현 선생은 이명준과 은혜의 ‘죽음도 불사하는’ 이 치열한 사랑을 재해석하면서, 최인훈의 <광장>을 ‘이데올로기’가 주제가 아니라, ‘사랑의 재확인’이 주제라고 했습니다. 이명준 역시 제3국으로 가는 배에서 따라오는 갈매기 2마리를 보고 비로소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사랑하는 은혜의 용기를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까닭에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을 선택한 것이지요. 어쩌면 비평가 김현은 그가 평하는 작가보다 그 작품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가 벌써 김현 선생님 타계 30주년이군요.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있는 감성적 언어로 따뜻한 비평을 하신 선생님이 그립네요.
시인 박경리가 “문필가”라는 시에서 “사랑이 있어야/ 눈물이 있어야/ 생명/ 다독거리는 손길이 있어야/ 그래야 그게 참여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시대의 진정한 참여문학가는 ‘따뜻한’ “다독거리는 손길”을 지니신 김현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새것’만 추구하고, ‘정확’성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입니다.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어제 저녁자리에서 선배가 이야기한 우리들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고 느리게 보내기로 했다는 말과 <안녕, 헤이즐>에서 숫자의 무한대의 상대적 크기에서 오는 비록 짧지만 행복이 충만한 삶, 그리고 <광장>에서 사랑을 위해 “죽기전에 부지런히 만나”자던 은혜가 보여준 여인의 용기는 우리들에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만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삶이 얼마든 상관없이 그 짧은 시간의 무한대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노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면서 시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너무 짧아, 싸우고,
사과하고, 짜증내거나 불평불만하고,
변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 짧은 인생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랑할 뿐입니다.
There isn't time, so brief is life,
for bickerings, apologies, heartburnings, callings to account.
There is only time for loving,
and but an instant, so to speak, for that.
마크 트웨인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 동안에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트웨인은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없이 그저 사랑하라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예외없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각자에게 남은 길고 짧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의 무한대는 크기를 달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 예상하지 못한 고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칭 ‘행복전도사’라고 하시며,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주던 법조계에 몸담고 계신 고등학교 선배가 이렇게 위로한 것이 기억납니다. “김교수, 지난 시간,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요.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만 집중하세요. 그럼 행복할 수 있을겁니다.”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 남자주인공 거스의 집에 갔을 때 헤이즐이 문간에 걸려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견뎌야만 한다.” 고.....
라틴어에 “시간이 가장 훌륭한 재판관이다(Tempus est optimus iudex rerum omnium)이란 말이 있지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결국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다는 말이겠지요. 다른 말로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언젠가 다가올 무지개를 기다리며 홀로 외롭게 시간의 감옥을 견뎌야만 합니다. 진실은 시간의 감옥에 외롭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치욕보다 견디기 힘들지 않”으므로 차라리 홀로움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새빨간 칸나가
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본인 여선생은
해명하려는 내 뺨을 때리며
변명하지 말라 호통쳤다
항구에서는 뱃고동 소리
칸나는 더욱 붉게 타고
어린 나는
진실에 힘없음을
깨닫고 울었다
어른이 되어
더러
해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치욕을 느꼈다
차츰 나는
해명을 하지 않게 되었고
홀로 되었다
외로움은 치욕보다
견디기 힘들지 않았고
소쩍새 울음이나 들으며 산다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진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고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박경리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소리를 들으며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가는시간”의 흐름에 괴로워하며 “제발 소리를 내지 말아다오”라고 시간에게 애원하기도 했지요. 그는 이렇게 ‘시간’을 노래합니다.
커피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시간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을 마시듯이
커피를 삼킨다
제발 소리를 내지 말아다오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 가는 시간
모터가 시간을 토막내고
미치겠구나
나는 강물로 살고 싶은데
나는 구름으로 살고싶은데
아아 들판 싱그러운 풀로
살고 싶은데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시간 1”
그리고 ‘강물처럼, 구름처럼, 그리고 싱그러운 풀처럼 살고 싶은 박경리 선생님은 토막나는 시간을 이렇게 보내라고 말합니다.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그렇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기간동안 사랑할 시간 밖에 없다면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은 까닭에, 그리고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인 까닭에 “목에 힘주”지 말고 겸손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박경리 시인의 말처럼 우리들의 시간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낮은 사랑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만이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서 인생 육십 고개 넘어 시인 박경리는 그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시가 구절구절 제 가슴팍에 꽂힙니다. 저도 시인의 말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들판의 싱그러운 풀처럼 그렇게 몸을 낮추고, 또 낮추어서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고독서원>
짐 크로체의 “Time in a Bottle” 함께 들으시겠습니다. 행복하시고 고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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