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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말로 옮겨서 이야기를 만들면 견딜 수 있다’ : 어느 젊은 시인의 깊은 슬픔

고독서원 2021. 6. 25. 18:21
장적의 시집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이에게>에 실린 사진작가 서지영의 <꿈꾸는 꽃 > 시리즈 가운데 ‘연꽃’

“예술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예술은 짐짓 아닌 듯, 감춰진 욕망이다
천박한 자본을 무시하지만 자본을 꿈꾼다
비루한 욕망을 비판하지만 욕망을 꿈꾼다
대의와 낭만으로 자긍심에 취하지만 버겁다
자정 넘게 어우러진 음주의 환희와 연대가
찬 새벽 두통으로 잠이 깼을 때
깨달았어야 했다

예술이 눕고 일어선 자리를 보고 알았다
예술도 그저 또 하나의 남루한 세계
세상을 빛나게 하는 높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장적, ‘예술은 예술인가’ 가운데

서재에 새롭게 입양된 가족, 장적의 l<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이에게>(2021)

짧은 여행을 다녀오니 기다려온 장적 시인의 신작 시집,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이에게>(2021)가 마침내 내 소박한 책상 위에서 앉아 있었다. 출판사 소개글에 올라온 몇몇 시들을 먼저 읽어본 터라 시집에 담긴 다른 시들과 그 시작의 연원을 밝힌 ‘에필로그’가 궁금해졌기에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시를 한 수 한 수 꼼꼼히 정성스럽게 읽고 나니 ‘깊은 슬픔’ 뒤에 문득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1958)에서 인용한 그 문장.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서 이야기로 만들면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I think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아이작 디네센 Isak Dinesen, 1957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덴마크 소설가 아이작 디네센(1885-1962), 카렌 블릭션의 필명

이 문장은 영화 <아웃 어브 아프리카(Out of Africa)(1985)>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덴마크 소설가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이 1957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아이작 디네젠 원작,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 &lt;아웃 어브 아프리카&gt;의 카렌(메릴 스트립 분)과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 덴마크에 사는 카렌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친구인 바로 브릭센 남작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아프리카 생활을 꿈꾸며 결혼을 약속한다. 캐냐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커피 재배를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고, 브로 남작은 영국과 독일간에 전쟁에 나간다. 혼자남은 카렌은 어느날 초원에 나갔다가 사자의 공격을 받게 되고 데니스란 남자에게 도움을 받는다. 남편의 외도로 별거를 결심한 카렌은 데니스와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카렌에게 있어서 데니스는 인생의 나침반 구실을 한 남자였다. 결국 남편과 이혼한 카렌은 사랑하는 데니스에게 결혼을 요구하지만, 인간이나 자연만물은 결코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데니스는 자유로운 의지의 표현으로서 우정과 사랑을 원한다고 말하며 떠난다. 커피 수확물 창고에 화재가 나 파산한 카렌은 덴마크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완전한 사랑으로 ‘외로움’이란 것을 알게된 데니스는 다시 돌아와 떠나는 그녀를 배웅해주기로 약속한 전 날에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추락사한다. 카렌이 데니스의 장례식에서 영국시인 하우스먼(A.E. Houseman; 1859-1936)의 슬픔이 짙게 베인 시 "어느 젊은 운동 선수의 죽음을 위하여(To an Athlete Dying Young)”를 읽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이 시는 찬란한 영광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젊은 운동 선수는 결코 영광의 빛이 시드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역설적으로 노래함로써 그 슬픔의 깊이를 배가하고 있다. 이 시는 인간의 유한함을 시적으로 표현한 구약성서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와 함께 인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대표적 엘레지이다.

시드니 폴락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바로 디네센의 전기적 삶을 1937년 소설로 발표한 것을 각색하여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서 7개부문을 수상한 1980년대 감동적인 명화이다. 독립적인 한 여성의 사랑과 상실의 아픔을 담은 이 영화는 “어떻게해야 삶을 견뎌낼 수 있는 지”를 스토리텔러로서 이야기한 대표적 작품이다.

슬픔은 어느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디네센은 슬픔을 알고 있는 작가다. 그의 아버지는 자살했고, 남편과는 이혼했으며, 본인은 몹쓸 질병에 시달려 고통당한 적이 있을 뿐 만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을 품고있었던 케냐 목장이 파산하는 어려움조차 감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왠지 그에겐 ‘슬픔의 자격증(license to grieve)’을 부여한다.

우리시대에도 디네센 못지 않은 슬픔을 경험하고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 “불쑥” 등장한 작가가 있다. 자동차 사고로 어린 두 딸을 잃어버려서 “죽음보다 깊은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던, 한 쪽의 꽃만을 이쁘게 보고 ‘발굴’ 해야만 했기에 스스로 “붉은 비단(赤幣)”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던, 칼을 쓰며 ‘바람의 검심’을 생각해야만 했던, 그래서 그 “찬란한 5월”을 “아! 5월”이라 끝내 말할 수 없었던, 그리하여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어제 자살한 사람”으로 “개미처럼 겸손히 살다가” 마침내 ‘참회’의 글을 써 세상에 겸허히 내민 시인이 있다. 디네센처럼 이 시인도 그의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어냈기에 삶을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슬픔이 개인의 슬픔을 넘어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울려퍼짐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오늘도 정성껏 작성한 입사 지원서를 들고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오지 않으면 안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일자리를 찾고있는 “꽃보다 고운 20대”를 위한 시는 아프다. 나는 그래서 그 사람이 아프다. 그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로 만든 ‘아픈 날이 많더라도—꽃보다 고운 20대를 위하여’를 먼저 읽는다.

‘아픈 날이 많더라도— 꽃보다 고운 20대를 위하여’

입사 이력서를 준비하고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는 꽃다운 20대 “쌰륵 쌰륵 외로움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견디는 시간 오지 않으면 안 될 그날에 기댄다” —장적 ‘아픈 날이 많더라도’ 가운데

“합격 통지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입사 지원서가 어지럽게 쌓이고
컴퓨터 속에는 아픈 자격증들
한 줄 문장을 바라며 졸고 있다

마감일이 지나 또 다른 마감일
익숙해지지 않을 지원서의 여백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온 세상이 나를 연호하는 듯 날아올랐다가
급전직하 나를 외면하는 현실에
인생은 별나라 그림책이 아닌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먹어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사륵 외로움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견디는 시간
오지 않으면 안 될 그날에 기댄다

자정 넘으면
낙심도 희망도 모두 찬 빛인데
버들피리 같은 연민을 담고
내 시간은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내면 깊숙이 내 말들은 많지만
회사에 선보일 더 나은 나를 위하여

틱 탁탁
또 한 문장의 새로운 나를 만든다”

—장적, ‘아픈 날이 많더라도— 꽃보다 고운 20대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시들이 마음에 와닿았지만, 그 가운데 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그가 부디 슬픔으로 빚어낸 주옥같은 시들로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지나” 이제는 두 번째 산등성이에 난 평평하고 새로운 길에서 “붉은 비단처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런 그를 위해 하우스먼이 “젊어서 죽은 어느 운동 선수에게” 바친 비가를 바친다.

“이제 그대는 그 무리에 끼지 않으리
명예를 소진해 버린 젊은이들이나,
명성에 추월당한 주자들 혹은
사람보다 먼저 이름이 죽은 무리에

그러니 영광의 메아리 사라지기 전에
재빠른 발로 어둠의 문턱을 딛고 서서
아직 방어된 그대의 우승컵을
낮은 문틀까지 들어 올려라”
Now you will not swell the rout
Of lads that wore their honours out,
Runners whom renown outran
And the name died before the man.

So set, before its echoes fade,
The fleet foot on the sill of shade,
And hold to the low lintel up
The still-defended challenge-cup.

—하우스먼(A. E. Houseman), ‘어느 젊은 운동 선수의 죽음을 위하여’ 가운데

‘어떤 날’


“지원심의 평가회의 전
국회로부터 청탁이 들어왔다
A 사업을 도와주라고 했다
지원심의 회의에서 어떻게 해달라는 거였다
결과는 탈락”
—장적 ‘어떤 날’ 가운데

‘발굴’


“전화로 말을 건네 오는 그 목소리
그였는지 그녀였는지 흐릿하다
일부러 기억을 지워서일 거다
사람은 잊었지만 문장은 기억한다
배제 대상을 발굴해볼 수 없겠느냐고 했다
웃었다
내가 웃자, 그, 혹은 그녀도 웃었다
아니, 그, 혹은 그녀가 먼저 웃으며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웃고, 그, 그녀도 웃고, 모두 웃었다
그냥 웃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웃음이지만 웃음이 아닌 웃음들
이후 더 이상 그 말은 없었다”
-장적, ‘발굴’ 가운데

‘다시 쓰는 풀꽃’


“자세히 보아아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니다
너가 예쁜지 사랑스러운지 봐야겠다
너는 어느 편이냐?”

—장적, ‘다시 쓰는 풀꽃’

‘고해성사’

“홀로 정의가 높은 사람들
홀로 의로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싫어졌다

정의를 바라지만 못 미치고
뜻이 높지만 다음 길을 찾는
높은 말을 알지만 굳이 말을 않는
어둠에 가려진 눈물이 있다”
—장적, ‘고해성사’ 가운데

‘고애신처럼 지붕 위를 날고 싶었다’

“오, 얼마나 이날을 바라왔던가
그런데 이상하다
어둠 때문일까? 아니면?
목표물의 경계가 번지기 시작한다
거짓과 진실이 엉켜 있다
위선과 선이 어깨를 겯고 있다
욕망 가운데 버티고 있는 저 침묵은 또 무엇인가?
불의인데 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장적, ‘고애신처럼 지붕 위를 날고 싶었다’
가운데

‘백령도 가는 길’

“반공도, 적폐도, 친일도, 종북도 이런 말 아닌 말 없는 곳 쑥부쟁이, 금낭화, 코스모스 별빛, 달빛, 산들바람 평화로운 곳”

‘마태복음 6:14-15을 묵상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장적, ‘마태복음 6:14-15을 묵상하다’ 가운데

멈춘 강물이 다시 흐르고 날아간 새들이 다시 돌아와 노래하는 흩어진 꽃잎들이 다시 탐스럽게 피어나는 봄길 절망이라는 디딤판 위 이미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이다 운명의 노크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장적,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는 그 ‘길’에 대한 각주”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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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문학ㆍ예술인에게 필요한 것”

‘오늘날의 문학ㆍ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과감한 쿠테타이다. 그들의 '스폰서'(물주)로부터의 미련 없는 결별이다. 그들이 자기 물주를 생산의 비호인으로 갖고 있든, 소비의 고객으로서 갖고 있든, 어쨌든 그들 개개인의 결별이 아니라 집단적인 결별이라면 좋다. 그리하여 대중의 정의와 양심의 역사적 대하 속에 혼연히 뛰어들 때 비로소 문학ㆍ예술은 고래의 그 환락의 수단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는 것이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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