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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숨결이 하늘과 바다에 충만한 여수로 오라”

고독서원 2020. 12. 1. 09:22
2020.11.29 여수 오동도 앞바다와 하늘에 핀 동백꽃

“햇살의 다사로운 촉감을 맛보려거든
여수로 오라
파도의 부드러운 음률을 어루만지고 싶거든
여수로 오라
생명의 숨결이 하늘과 바다에 충만한
여수에서는
동백꽃도 타는 가슴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지느니
평화로운 저녁노을에 취하고 싶거든
여수로 오라
사랑스런 꿈의 별빛을 가슴에 품으려거든
여수로 오라”

— 허형만/‘여수’

11월의 마지막 밤을 여수에서 보냈습니다. 코로나와 혼탁한 정치로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명의 숨결이 하늘과 바다에 충만한” 여수가 보고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백꽃도 타는 가슴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시인 허형만은 “여수로 오라”고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햇살의 다사로운 촉감을 맛보려거든...

파도의 부드러운 음률을 어루만지고 싶거든...

평화로운 저녁노을에 취하고 싶거든...

그리고
사랑스런 꿈의 별빛을 가슴에 품으려거든
여수로 오라

별주막 간판과 아래에 진열된 세계막걸리, 그 뒤로 서가가 보인다.

11월 마지막 주말 아침, 무심히 바다가 보고 싶어 배낭에 책을 몇권 넣고 수서역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주 평소 저를 동생처럼 챙겨주시는 대학 선배 두분이 늦가을 번개를 처주셔서 ‘별주막’이라는 세계 막걸리집에서 파전과 생굴보쌈을 곁들여 이른 저녁부터 각종 막걸리를 섞어 마셨더니 토요일 아침에 문득 어딘가 떠나고 싶어졌었나 봅니다. 낮에는 서점을 운영하는 독특한 주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늦가을 어느 흐린 오후에 주점에 앉아 있었던 셈입니다.

코로나 시대 SRT 수서역의 문화나눔

고속철 SRT는 여수로 가는 노선이 없어서 수서역에서 목포를 지나 여수로 가기로 했습니다. 수서역사 1층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로비 정 가운데 “Let’s Play: 마음을 연주하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습니다.

어느 중년 여인이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해 갈 때 공포에 울부짖는 승객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여객선 악사들이 연주한 바로 그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요. 악보를 보시면서 조심스럽게 연주하시는 모습이 전문 연주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피아노 선율을 따라 가만히 감상을 하고 나니 뭔지 모를 마음의 평안이 찾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41txhi2nfY&feature=share

그 이름모를 여인이 연이어 몇곡을 연주하더니 악보를 들고 수줍어 하시며 그만 자리를 정리하고 가시더군요. 잠시 뒤 승객들이 앉아 있는 좌석 뒤 쪽에서 한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나오더니 피아노 앞에 앉아서 능숙한 솜씨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범상치 않은 실력으로 그 유명한 월광의 선율을 열어나가고 있었지요. 그 순간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노란 달빛이 수서역 천장을 부수고 환하게 내려오고 있었지요. 서둘러 핸드폰으로 그 연주장면을 녹화를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연주는 3악장으로 빠르게 치닫고 있었지요. 그 분의 연주를 1분 남짓 이렇게 동영상에 담아 보았습니다.

수서역에서 음악으로 마음을...

코로나 시대에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재능 기부 형식으로 문화예술 나눔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순간 가슴 한쪽이 뭉클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리더십과 영웅적 희생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배려로 말입니다.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모든 의료진과 방역 종사자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4C8b5D_xvM&feature=share

그래서 저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종착지 에 도착할 때까지 수서역의 고마운 시민 연주자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월광’ 1악장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월광’은 우리나라의 천재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연주입니다.

월광의 깊고 잔잔한 음률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여수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바람은 좀 세게 불었지만 맑은하늘에는 흰구름에 둥실 떠다니고, 드넓은 바다는 푸르름이 켜켜이 색을 달리하며 펼쳐있었습니다. 우리의 육안에 포착되는 파란색의 종류가 255가지나 된다고 하지요.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저에게 ‘여수’는 역사와 문학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역사로는 해방이후 좌우 대립의 비극적인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었으며, 문학으로는 “삶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단함을 섬세하게 살피며 존재의 상실과 방황을 그려낸”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이었습니다.

여수의 바다를 보니 오래전 읽은 이 소설집 제목으로 사용한 중편 ‘여수의 사랑’에서 여수가 고향인 두 젊은 여자 주인공, 정선과 자흔의 외로운 삶이 아스라히 생각이 나네요. 소설에서 묘사된 여수 앞바다에 대한 다음 두 문장은 눈앞에 비바람이 치는 여수 앞바다를 펼쳐보이는 것 같았지요.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껍질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 한강의 <여수의 사랑>

그리고 단편 ‘야간 열차’에 묘사된 ‘홀로움에 대한 한강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삶의 본질적인 적요한 ‘고독과 외로움’이란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느끼게 해주었지요. 아마도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제 생각은 이 무렵에 자리를 잡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녀가 말한 ‘껍질’처럼 말입니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피가 끓고 눈이 부신 젊음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 이제는 내 몸에 잘 맞는 껍질이었다. 그 껍질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 한강, <여수의 사랑>

“우리 시대의 가장 젊은 고전”으로 알려진 <여수의 사랑>은 <채식주의자>로 세계적인 문학상 맨부커 상을 수상한 한강의 첫번째 데뷔작입니다. 한강에게 여수는 언제나 “상처 입고 병든 이들이 마침내 다다를 서러운 마음의 이름”이었습니다.

한강은 이 소설집에서 “운명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통해서 “떠나고, 버리고, 방황하고, 추락하는 고독하고 고립된 두 명의 등장인물들을” 고통스럽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 가까이에서 존재의 살아 있음을 일깨우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는” 등장인물들이 하여금 “차갑고도 뜨거운 여운을” 남긴 채 글을 맺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을 떠올리면서 오동도 둘레길을 걷노라니, 숲 한켠에 아름드리 동백꽃이 피었더군요. 피지 않는 꽃은 없다고 하더니 모란 동백이 일찍 피었네요. 원래 오동도의 동백꽃은 3월에 만개하지만 마음 급한 상냥한 동백 아가씨들이 서둘러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 한 구석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햇살 다사롭고 부드러운 파도의 음률을 들으며 생명의 숨결이 충만한 하늘과 바다에 코로나와 혼탁한 일상에 짓눌리고 찌들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은 느꼈습니다.



빨간 동백꽃을 보니 엇그제 집 정원 구석에 환하게 핀 모란동백이 생각납니다. 하루종일 이제하 시인의 ‘모란동백’을 틀어놓고 그 동백아가씨와 이야기하듯 시간을 보냈지요.

마침 며칠 전에 강남 선릉에 위치한 ‘최인아 책방’에서 ‘모란동백’을 불러 히트시킨 조영남 선생의 북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조영남 선생은 코로나 2단계 격상에도 침석해 주신 독자들을 위해 ‘모란동백’을 라이브로 들려 주셨습니다. 그 장면을 놓칠 수는 없었지요😊.

살다보면 믿기 어려운 우연의 일치를 경험하게 되지요. 정말 우연의 일치로 조영남 선생을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집 아파트 베란다 정원에 모란동백 한 송이가 크게 피었고, 그 모란에 취해 하루를 보내다 그날 저녁에 바로 그 노래를 들은 셈입니다. 그리고 하루 걸러 주말에 여수 오동도에 와서 제일 먼저 핀 📍동백꽃을 또 보게 되었습니다.

최인아 책방 북콘서트에서 모란동백을 노래하는 조영남 선생

이렇게 11월의 마지막을 여수에 내려 와서 붉은 모란동백과 푸르른 바다와 함께 가을을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스런 꿈의 별빛을 가슴에 품으려...”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코로나 일상에서 벗어나 틈을 내시어 여수로 오시기 바랍니다. 여수의 사랑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의 숨결이 하늘과 바다에 충만한” 여수를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ijCmUkqrc&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