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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차이코프스키의 6월의 노래는...

고독서원 2021. 6. 4. 07:42
노천명(1912-1957), 황해도 장연 출생, 본명은 노기선, 어릴 때 몸이 아파 죽다 살아나, 어머니가 하늘이 내린 생명이라 해서 ‘천명’으로 개명했음. 진명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진명여고 재학 중 그는 어휘력이 뛰어나 국어사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음,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시 1932년 시 ‘밤의 찬미’로 등단, ‘사슴’으로 필명을 떨침. 해방후 이화여대 출판부, 한국전쟁 후에 이대 등에서 강의하였음. 시집 <별을 쳐다보>(1953)와 <사슴의 노래>(1958),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1973)가 있음 .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든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피는 6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노천명, ‘6월의 언덕’

설국펜션 창밖으로 보이는 덕유산의 아침 풍경

6월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 덕유산의 풍광이 차경으로 들어왔습니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토퍼 심슨(Christopher Simpson)의 ‘6월(June)’이흐르고 있었지요.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며, 아, 6월이구나! 아, 덕유산이구나!하며 비로소 존재의 시간과 공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덕유산 설국펜션은 모든 방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솔제니친, 토마스 만 등 낯익은 작가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나그네를 위한 호스트님들의 환대 역시 노벨상 수준이다. 타자에 대한 따뜻한 환대에 감사드린다.

어제 늦게 덕유산에 들어와 ‘설국’이라는 펜션의 이름에 이끌려 바로 잠든 기억이 소록소록 났습니다. 창문으로는 아침햇살이 물결처럼 소리없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잔물결같은 빛의 파장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차이코프스키의 ‘6월의 뱃노래’라는 피아노 소품이 생각났습니다.

표도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1840-1893) 러시아 작곡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러시아의 모차르트라 불리며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친 그는 어린시절 사랑했던 음악가정교사와의 이별, 어머니의 병사,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기 힘든 상실의 상처를 입는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고난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듯, 어린시절의 상처는 후에 그로 하여금 러시아의 우수와 고독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 법률학교에 입학하고 법무부 서기로 일하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던 그는 마침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면서 러시아를 세계에 가장 잘 알린 변방의 빛나는 별이 된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죽음은 노천광산처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음악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그의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비발디와 하이든과 함께 자연의 사계절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지요. 12개의 성격적 소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피아노 독주곡 ‘사계’입니다. 이 곡은 1875년 12월부터 매달 한 곡씩 1년 12달이 갖고 있는 분위기를 차이코프스키가 아름다운 시와 함께 묘사한 것으로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선율들이 전곡을 감싸고 있습니다.

러시아 탐보프의 츠나 강

1875년 5월에 작곡한 ‘6월의 뱃노래’는 그 가운데 백미로 꼽힙니다. 러시아 츠나강에 스쳐가는 6월의 바람 때문인지 그의 6월의 뱃노래는 흥겨움보다 쓸쓸한 고독이 흐릅니다.

사실 노천명은 시보다 수필을 더 많이 썼습니다. 노천명의 시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처럼 ‘고고하고 외롭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수필은 오히려 그 고독을 사랑하고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고독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나는 적적한 것과 잘 사귀고 또 좋아질 수도 있다’라고 그녀는 말하면서 ‘여백의 즐거움’이 자신의 삶을 지탱한다고도 하였다. 월북한 경제학자 김광진과의 연애로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다간 노천명은 생애 두 번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상처 입고, 1957년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오늘은 6월의 첫주를 맞이해서 사슴같은 시인 노천명의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오는” 6월의 처연한 고독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감미로운 우수에 찬 6월의 노래를 감성적 아티스트 임동혁과 김연아 그리고 밴 클라이번의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KfqCa6xH-GY&feature=share

덕유산 설천봉에서 내려오는 곤돌라. 덕유산 등반은 구천동 어사길을 따라 비경을 감상하다 백련사를 지나 오수자굴을 경유해서 중봉으로 오른 뒤, 항적봉까지 능선을 타고 걸으며 백두대간의 장엄미와 원추리꽃 등 야생화 군락을 감상하고 항적봉에서 설천봉으로 내려와 곤돌라를 타고 하산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 가운데 하나이다. ‘설천(雪川)’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의 억압을 피해 구천의 승려가 덕유산 구천동에 은신하게 되자 이들이 먹을 삼시 세끼 밥을 짓기 위해 엄청난 쌀을 씻은 물이 계곡을 따라 마치 눈이 내려 흐르듯 흘러 ‘설천’이라 하였다 한다.

“달빛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 위를 곤돌라가 간다. 상쾌한 강바람을 따라 어디선지 모르게 전해 오는 뱃노래가 6월의 밤의 애수를 달랜다.” -프레시체에프

덕유산 설국 펜션에 핀 ‘기다림과 소원’이란 꽃말을 지닌 ‘달맞이꽃’
김연아가 밴 클라이번의 차이코프스키의 ‘6월의 뱃노래’를 달맞이꽃을 배경으로 연주하는 모습. 그녀의 자태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https://youtube.com/watch?v=O4YJ1vetHjA&feature=share

반 클라이번(1934-2013), 미국의 피아니스트. 1958년에는 구소련의 제 1회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 참가하여 냉전시대에 미국출신 피아니스트로 1회 대회에 최초로 우승함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명성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의 피아노는 음이 맑고 밝으며, 낭랑한 울림에 넘쳐 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악곡의 해석도 유럽의 인습에 구속되는 일이 없고, 미국다운 신선한 음악성을 이들 고전에 주고자 하는 의욕에 찼다.
“바다로가자/ 신비로운슬픔을머금은파도가/우리의다리에키스를보낸다/ 별들이우리머리위에서반짝인다 Let us go to the shore; / there the waves will kiss our feet. With mysterious sadness/ the stars will shine down on us” -알렉세이 프레시에프, ‘6월의 노래’ 차이코프스키의 6월의 노래와 함께 실린 연작시


청춘의 계절 6월(June)은 '쥬피터'의 아내 '쥬노'(Juno) 에서 유래했다지만,"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주니어 iuniores’에서나왔다고 합니다.그래서 어떤 분은 차이코프스키'의 이 '6월의 뱃노래'를 처음 접하였을 때, 처연한 고독보다는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으로 꼬옥 쥐던 순간처럼 심장이 멎을 듯한 감동과 짜릿한 행복감을 느꼈었다”고도 합니다. 그럼 그 첫사랑의 감동을 이번에는 첼로의 선율에 한 번 담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u4oZcmMH8pU&feature=share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으로 쥐는 것이다."
-스탕달, ‘연애론’ 가운데

우리에게 노천명과 김연아 그리고 임동혁이란 아티스트가 있다는 것이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와 미국의 밴 클리이번 못지 않은 6월의 첫주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아침을 먹은 뒤, 행장을 챙겨 덕유산 무주구천동 계곡을 따라 펼쳐진 33경을 보기로 작정하고 조선시대 옛길인 ‘구천동 어사길’ 입구로 향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고난에 찬 기나긴 행군이 될 것 같습니다. 꽃과 나무들의 향기로 가득찬 향적봉에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두근두근 설레이네요.

덕유산 설국펜션 뒤에 자리한 높이 17m, 둘레 5m의 무주 삼공리 반송(盤松) ‘반송’이란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를 뜻하며, 영어로는 우산을 닮아 ‘umbrella pine’이라고 한다. 이 지역 이름을 빌어 구천송이라고 부른다.

설국펜션에서 나와 구천동 주차장으로 가려하는 데 펜션 뒷동산에 200년이나 지난 엄청나게 큰 우산모양의 소나무, ‘무주 삼공리 반송’이 두 팔을 벌려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여름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잠시 쉬고 싶은 아늑한 그늘이 참 좋았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솔향기를 흠뻑 들이마신 뒤 길을 나섰습니다.

그럼, 오늘도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에 마음을 담아 계곡의 폭포수와 푸른 숲 그리고 드넓은 하늘과 바다를 생각하시며 고독하시기 바라겠습니다.

“6월의 시작 오늘은 꽃보다, 음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