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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의 시적 순간을 찾아서

고독서원 2022. 2. 12. 15:38


“좋은 시란
우리 마음에 맺혀 있는
어떤 매듭이 건드리지는 순간마다
다시 울려오는 법”

-이인성

시인 황지우(1952~ )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황지우, ‘거룩한 식사’ 가운데”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가운데


시인 황지우는 1952년 전남 해남 출생했다. 본명은 황재우(黃在祐)(본명과 필명이 다른 이유가 한글 타자기의 오타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미학과 및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가 총장을 역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뒤 쓰여진 추모시 중 가장 유명한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를 썼다. 강하고 용기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용서란 자신을 위한 것이므로…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한 생(生)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그거? 용서하는 거야.”

황지우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 가운데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같은 해 『문학과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기호‧만화‧사진‧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화엄사상(華嚴思想)과 마르크스주의를 기저에 둔 <나는 너다>(1987), 현실과 초월 사이의 갈등을 노래하며 그 갈등을 뛰어넘는 화엄의 세계를 지향한 <게 눈 속의 연꽃>(1991), 동시대인의 객관적인 삶의 이미지와 시인의 개별적인 삶의 이미지가 독특하게 겹쳐져 생의 회한을 담고 있는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1998) 등을 간행하였다.


황지우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기법을 통해 풍자와 부정의 정신 및 그 속에 포함된 슬픔을 드러내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를 풍자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그의 시에는 정치성‧종교성‧일상성이 고루 배어들어 있다.


‘시적 순간’을 맞이한 어느 ‘시인의 이야기(Poetic Narrative)’


시인 황지우는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에서 그의 그의 굴곡 많았던 삶의 회한을 차곡차곡 담았다. 어느 흐린 날 어두운 주점에 앉아서 불꽃처럼 피어오른 그의 시적 순간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보았다. 그의 시는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 없다. 그에게 시란 아름다움과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무기이다. 전염된 인간시장에 대한 강력한 항체를 만들어내는 백신과 같다. 그것이 그가 걸어온 ‘문학의 길’이다.

“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만 있을 필요가 있는,
신분 없는, 다만 정신일 뿐인 귀족주의! 나는 그것이 문학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장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문학의 귀족성을 나는 요청하고싶다.”

-황지우,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에서


이야기 1.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황지우, ‘발작’


이야기 2.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그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황지우, ‘재앙스런 사랑’ 가운데


이야기 3.


……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에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 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가운데


이야기 4.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것이다
……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황지우, ‘거룩한 식사’ 가운데


이야기 5.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 6.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
삶을 한 번 되물릴 수 있는 그곳
……
영원한 바깥을 열어 주는 문
이 있는 그곳 “

-황지우, ‘노스탤지어’ 가운데


이야기 7.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
고향에서 밥을 구하는 자는 폐인이다.”

-황지우,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가운데


이야기 8.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알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시인 황지우의 삶과 시적 영감의 순간을 그의 시들로 엮으면서 문득 떠오른 두 편의 시가 있다.
오늘도 다시 그 “흐린 주점”을 향해 길을 떠난다.
이형기, 조지훈 시인의 ‘낙화’를 떠올리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落花)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1933~2005) ,’낙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1920~1968),’낙화’

#황지우 #어느날나는흐린주점에혼자앉아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