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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향해 온 몸을 세운” ‘제라늄’과 플래너리 오코너

고독서원 2021. 7. 7. 08:37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윌리엄 블레이크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새빨간 꽃잎, 원형의 초록 잎사귀, 햇빛을 향해 온 몸을 세우는 꽃”
-나탈리 골드버그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가에 빨간 제라늄꽃이 고독하게 피었습니다. 바로 제 코앞에 말입니다. 그나마 구름에 차단된 한줄기 옅은 빛이라도 온몸으로 흡수하려고 성이 잔뜩 난 것처럼 몸을 창쪽으로 향해 서있습니다. 창가에 놓아두는 이유는 화사한 꽃을 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꽃을 이용해 방충 효과까지 얻기 위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모기를 쫓는 식물이라서 ‘구문초(驅蚊草)’라고 부르기도 하는 제라늄은 모기가 싫어하는 냄새를 갖고 있습니다. 제라늄 향기를 모기는 싫어하지만 물을 줄 떼면 상쾌한 향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제라늄(Geranium)’은 그리스어로 ‘학’을 뜻하는 ‘게라노스(geranos)’에서 따온 말로, 열매의 모습이 길쭉한 것이 마치 학의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붉은 색 꽃중에 가장 예쁜 꽃이지요. 제라늄의 꽃말은 색깔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붉은 색은 ‘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와 그대를 사랑합니다.’입니다.

제라늄은 남아프리카 원산으로 홑,겹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한 색을 자랑하며, 줄기는 높이 30∼50cm정도에, 잎은 부드러우며 자루가 길고 사람의 마음 모양의 원형입니다. 제라늄은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고 사랑받는 반려식물 중 하나이며, 도심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꽃으로 ‘팬지, 피튜니아, 마리골드, 베고니아’와 함께 도시를 장식히는 ‘5대 길거리꽃’ 가운데 하나라고도 합니다.

문학 속의 제라늄

문학에서 제라늄은 좋은 소재입니다. 아마도 꽃의 강렬한 색깔과 상쾌한 향기가 작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가정집의 창가와 길가에서 흔히 볼 수 놓여 있는 꽃이기에 제라늄을 마음 한구석에 품어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먼저, 시조작가 오승희는 그녀의 시조집 <슬픔의 역사>(2016)에서 반려화로서 제라늄을 “희망을 놓친 날,…외로운 창가에 깃든 애틋한 위로”라고 노래합니다.

“반갑다 소리 내어 꼬리 흔들지 않아도
따스한 체온으로 품에 안기진 않아도

비껴든
살뜰한 햇살 따라
환히 피어난 미소

희망을 놓친 날
무릎 꿇고 손 모으면

여린 잎이 응답하고 꽃송이 와락, 핀다

외로운 창가에 깃든 애틋한 위로여”
-오승희, ‘제라늄, 나의 반려화 ’, <슬픔의 역사>(2016) 에서

또한 시인 박진성은 시집 <식물의 밤>(2014)의 첫째 시 ‘제라늄’에서 “사랑의 입구”에서 “불기둥”처럼 붉게 타오르는 “육중한 신체”의 욕망을 읽습니다.

꽃잎에 수천 톤 욕망이 앉아 있다
육중한 신체가 타오르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 여린 불기둥
아서라, 꽃잎에는 아무것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한 잎 먹으면
피가 잘 돌겠다

가까스로 사랑의 입구에 서있다”
-박진성, ‘제라늄’ <식물의 밤>(2014)에서

한편 주부시인 박정남은 시집<명자>(2014)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붉은 제라늄을 ‘젊은 남성’의 ‘성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는 “붉은빛 자체로/ 꽃숭어리가 뜨거워/ 들여다보는 내 얼굴도 화끈거려”온다고 부끄러워 하면서 “두 딸뿐인 내 음이 강한 집을 밝게 비춘다’고 노래합니다.

“일 년 내내 붉은 꽃을 피워대는
제라늄은 그 붉은빛 자체로
꽃숭어리가 뜨거워
들여다보는 내 얼굴도 화끈거려

주렁주렁 붉은 성기들을 쏟아 내놓는 제라늄이
언제부터인가 두 딸뿐인
내 음이 강한 집을 밝게 비춘다

그 줄기차게 피워대는 생식성 때문에
집에 들이게 된 우리 집의
사철 붉은 젊은 남성
아침마다 환하게 웃으며
딸들이 물뿌리개를 들고 달려가 물을 준다.”

-박정남, ‘제라늄’ <명자>(2014) 에서


소설가 윤후명은 책 <꽃, 윤후명의 식물이야기>에서 그가 파리 생활을 회상하면서 ‘제라늄’이 파리 주택가 창가에서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다음과 같이 추억합니다.

파리의 겨울은 집집마다 창가에 놓인 제라늄꽃으로 내게 다가왔다.…
집집마다 창가에 놓인 겨울 제라늄꽃을 보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돌아와 기울이는 보졸레 누보는 제라늄꽃같이 밝은 위안이었다”

고 했지요.


제라늄은 서양문학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에서 어린왕자는 상상력이 고갈된 어른들의 물질주의에 빗대어 어른들은 제라늄 화분이 창가에 멋지게 진열된 있는 집은 상상하지 못하고, 100억짜리 집이라고 해야 멋지다고 말한다며 숫자만 좋아하는 어른들의 속물근성을 꼬집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예쁜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신 ‘10만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야, 정말 멋진 집을 보았구나’ 하며 감탄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이 우주로 떠나는 ET에게 선물하는 작은 화분에 심어져 있던 꽃도 제라늄이라고 합니다. 그는 왜 우주에 제라늄을 선물했을까요? 아마도 언젠가 우주여행이 가능해지면 우주 어딘가 어린왕자처럼 장밋빛 벽돌 집을 지어 창가에 제라늄 화분을 놓고싶은 것이 아닐까요? 아마존 창업자 베이조스가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고 우주여행을 떠난다니, 그의 우주선에는 무슨 꽃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제라늄’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의 첫 작품 제목이 ‘제라늄(1946)’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라늄’은 그가 석사 학위 논문의 일부로 제출한 것을 몇차례 수정해서 발표한 첫번째 단편 소설이다. 오코너는 39살의 나이로 죽기까지 2편의 장편 소설과 수십편의 단편소설과 에세이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남부 출신의 여성소설가로 카톨릭 색채의 종교적 목소리와 남부의 인종 문제를 지역 작가의 눈으로 정직하게 관찰하였다. 비록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으로 죽었지만, 그녀의 문학적 유산은 그녀로 하여금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 남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게 하였다. 한 때, 그의 소설에 표현된 인종차별적 표현이 문제가 된 적이 있으나, 남부 조지아의 인종관계와 문화를 향수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그의 시대와 공간의 목소리였을 뿐 그녀가 인종차별을 옹호하거나 백인우월의식에 사로잡혀 글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이 후세 비평가들의 평가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가 살아온 시대를 정직하게 관통하며 글을 쓴 것이다. 그녀가 태어나 활동한 미국 남부는 이미 역사적으로 불구의 땅이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지역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기형적이고, 소설은 고딕소설을 방불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은 고독한 인간의 내면의 문제와 종교 그리고 장애의 문제까지 깊이 있게 들여다본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의 문학을 읽어야만 까닭이다.

불행히도 제라늄이 제게 다가온 것은 ‘꽃’이 아니라, ‘문학텍스트의 제목’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대학에서 흑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소설을 공부하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함께 20세기 미국남부소설을 대표하는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er)를 만나 그의 단편소설 ‘제라늄(The Geranium)’을 읽게 되었지요. 그 때만 해도 꽃의 이름은 물론이고 식물에는 문외한이었던 터라, 소설을 읽어가면서 도무지 ‘제라늄’이 뭔지 궁금해하며 난독한 경험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 소설의 첫문단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더들리 영감은 차츰 자기 몸의 형태로 빚어지는 의자에 앉아서, 창밖으로 4~5미터 거리에 있는 더럼 탄 붉은 벽돌집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라늄을 기다렸다. 그 집 사람들은 매일 아침 10시 무렵에 제라늄을 내놓고 오후 5시 30분에 도로 들여놓았다. 고향의 카슨 부인도 창가에 제라늄을 두었다. 고향에는 제라늄이 풍성했고, 그 제라늄들은 이것보다 더 예뻤다. 우리 제라늄은 진짜배기지. 녹색 종이 리본을 단 이 연분홍색 제라늄하고는 전혀 달라, 하고 더들리 영감은 생각했다. 그 집 창가의 제라늄을 보면 영감은 소아마비에 걸린 고향의 그리스비 소년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소년을 휠체어에 태워서 데리고 나갔고 소년은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 눈을 깜박였다. 루티샤가 그 집의 제라늄을 가져다 땅에 심으면 몇 주 지나지 않아 보아 줄 만한 꽃이 될 것이다. 맞은편 집 사람들은 제라늄을 키울 권리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걸 내놓아서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을 쬐게 했고, 창턱에 너무 바짝 붙여서 바람이 불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제라늄을 키울 권리가 없었다. 권리가 없었다. 그것은 거기 있으면 안 되었다. 더들리 영감은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의 첫문단 둘째 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그 생경한 단어 ‘제라늄,’ “그는 제라늄을 기다렸다.” 제라늄이 사람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작가는 “제라늄을 내놓고, 창가에 제라늄을 두었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럼 제라늄은 물건이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제라늄은 그렇다면 우라늄과 같은 광물인가? 아니면 알리미늄과 같은 금속물질인가? 하면서 펼쳐지지 않는 독해의 지평을 넓히려고 애써야만 했던 어처구니 없던 일이 떠오르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제라늄들은 이것보다 더 예뻤다. 우리 제라늄은 진짜배기지. 녹색 종이 리본을 단 이 연분홍색 제라늄하고는 전혀 달라,” 아 그럼, 제라늄은 여자인가? 그러자 바로 이런 문장이 뒤따라 왔습니다. “그 집 창가의 제라늄을 보면 영감은 소아마비에 걸린 고향의 그리스비 소년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침내 ‘제라늄’은 다음 문장에서 꽃의 실체를 드러냈지요(그나마 원문에는 ‘꽃’이란 표현은 없고 ‘something’이란 단어를 썼는데, 오코너는 이처럼 독자에게 말로 직접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다음 문장으로 이어가면서 제라늄이 봄직스러운 이쁜 꽃임을 드러내고 맙니다. “루티샤가 그 집의 제라늄을 가져다 땅에 심으면 몇 주 지나지 않아 보아 줄 만한 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코너는 말합니다. “맞은편 집 사람들은 제라늄을 키울 권리가 없었다.”

‘제라늄’이라는 단편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습니다. 주인공 ‘더들리 영감(Old Dudley)’ 남부 조지아에서 살다가 뉴욕에 사는 딸 가족과 같이 살기 위해 뉴욕으로 왔습니다. 촌 영감이 뉴욕 구경도 하고 싶기도 했지만, 딸이 혼자사는 늙은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 모셔 아들과 같은 방을 쓰게 하지요. 좁고 답답한 도시 생활에서 흑인과 같이 사는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을 하는 더들리 영감은 늘 앞집 창가에 놓인 ‘제라늄’을 보며 남부에서의 흑인과의 전통적 관계를 그리워하며 시골고향에서 살던 전원적인 풍경을 떠올립니다. 그렇기에 더들리 영감에게 ‘제라늄’은 그가 심리적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며 뉴욕에 살면서 매일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유일한 희망의 빛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앞집 창가의 제라늄은 6층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더들리 영감의 고독과 외로움을 지켜주는 희망의 불빛은 그만 사라지고 맙니다. 제라늄은 뉴욕이라는 대도시가 결여하고 있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며 때로는 더 인간적인 삶의 상징이자, 전근대적 과거에 매여 사는, 소설 속의 뉴욕 아파트 흑인청년의 언어로 표현하면 “구닥다리(old timer)”의 삶의 일상을 밝혀주는 유일한 존재 이유였습니다. 이제 더들리 영감은 아무런 희망과 공감의 대상없이 소외와 고립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제라늄과 더불어 그의 옛사람은 장사지낸 것입니다. 평소와 달리 앞집 창가에 제라늄이 보이지 않자, 더들리는 묻습니다.

제라늄 어디있소?”…
“그것은 왜요 아래로 떨어졌어요.”
더들리 영감은 일어나 창문틀 넘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6층 아래 골목 길바닥에 먼지를 날리며 산산조각 깨진 화분과 푸른 잎사귀들 사이로 삐져나온 채 붉은 꽃잎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였다.

더들리 영감이 바닥에서 본 것은 단순히 깨진 제라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산산조각 나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는 앞집 남자에게 왜 내려가 주워오지 않냐고 묻자, 그는 “당신이나 하시오”하며 퉁명스럽게 답할 뿐입니다. 더들리 영감은 참다못해 내려가 주워 오려고 방을 나섰으나 한차례 신체적 곤욕을 치룬터라 6층 계단을 다시 오르내리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같은 층 살며 악의는 없지만, 예의없게 그를 ‘구닥다리’ 인간으로 부르는 흑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차마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아 앞집 남자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아마 노인 더들리도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뎃생 ‘슬퍼하는 노인’(1882)

이 단편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인종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이 소설이 읽기가 참으로 불편했습니다. ‘니그로’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띄어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비판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 더들리 영감은 요즘 유행하는 남부의 ‘꼰대’같은 백인 노인이있으며, 남부의 인종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뉴욕에 와서도 남부 백인의 인종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야말로 “구닥다리” 꼰대로 여겼지요. 오천 단어 미만의 아주 짧은 이야기에 흑인을 비하하는 ‘니그로’라는 표현을 수십번 이상 사용하는 작가 오코너 역시 당시 남부에 대한 향수와 인종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는 소설가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어느덧 노인을 바라보는 나이에 창가에 핀 제라늄꽃을 보고 난 뒤에 다시 읽은 오코너의 단편 ‘제라늄’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이 소설은 ‘인종문제’라기 보다는 세대간의 차이와, 도시와 자연이라는 거주공간을 중심으로한 ‘노인문제’ 로 새롭고 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나이들어 시골 기숙시설에 홀로사는 주인공 더들리 영감은 남부사회에 오랜 관행인 흑백관계에서 백인의 우월적 지위가 그저 편안했을지도 모릅니다. 남부에서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이런 관계와 문화를 서로 인정하는 ‘이해’가 있었기에 상호작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더들리는 고향에서의 흑인 친구와 낚시와 사냥을 하면서 쌓은 인간관계를 향수합니다. 그러나 이제 뉴욕에서는 과거에 서로 이해하며 행복했던 그런 흑백관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제라늄을 통한 기억만이 그의 전원적 과거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성인이 돼 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마음이 기쁨으로 넘쳐 오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이란 것이다. 뉴욕이란 도시로 이사와 사는 더들리 영감에게 ‘제라늄’은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어떤 물질적인 대상”입니다. 지나간 일들은 억지로 떠오르기보다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갑자기 떠올라 엄습하는 때가 더 많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 건너편 창가의 제라늄만이 그로 하여금 과거의 회상의 길로 안내합니다. 고향의 꽃 제라늄만이 노인 더들리의 고독을 유지해주고 있는 매개물이었습니다. 이제 6층 창가에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난 제라늄은 더들리의 고독한 삶이 뉴욕같은 도시환경에서는 더이상 유지할 수 없음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고독은 파괴되었고 길거리에 방치되어 정신적으로 해체되었으며, 그는 정신의 기억은 사라져 오로지 신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외로운 몸뚱아리로 전락한 것입니다. 뉴욕의 도시인들이 제라늄을 키울 권리가 없었던 것처럼 더들리 영감을 돌볼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노래했습니다. 앞서 인용한 시조시인 오승희와 소설가 윤후명과 같은 우리 작가들에게 제라늄은 위로와 위안이있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 역시 이 소설에서 제라늄이 주인공 더들리 영감에게 위로 이상의 삶의 의미와 존재이유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옥같은 뉴욕 생활에서 제라늄은 그에게 천국과 같은 존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수상락眉壽上樂’의 삶를 위하여

우리 시대의 많은 노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늙습니다. 그렇기에 젊어서부터 어떻게 아름답게 늙을 수 있는 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인학의 전문가인 문학하는 의사 유형준 교수는 <늙음의 오딧세이>에서 노인이 되면 누구나 겪는 네가지 어려움을 경제, 역할상실, 우울, 그리고 질병이라고 합니다. 오코너 소설의 더들리 영감도 이 4중고를 모두 겪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노인연금으로 살아가면서, 고향을 떠나 도시라는 낯선 공간에 우울한 삶을 살고 있지요. 6층 아파트를 오르내리기에 힘든 건강상 문제가 있고, 아무런 사회적 가정적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지요. 이 네가지 고충을 잊게한 것이 바로 고향의 제라늄을 기억나게 하는 앞집 창가의 제라늄입니다. 이 사물 안에 그의 과거가 숨어있어 그를 살아가게 한 것이지요.

그러나 오코너의 소설 ‘제라늄’에 나타난 더들리 영감의 문제는 ‘과거’에 안주할 뿐 앞으로 더 나가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그의 동료와 같이 대화적 형식으로 펴낸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Ageing Thoughtfully)>(2018)의 제3장 ‘지난 날을 돌아보며’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람들이 나이들수록 “회고적 감정”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는 그 자체가 존재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건강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어야 가치있는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부정적 과거는 그냥 흘려보내고,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새로운 내일을 위해 긍정적 과거를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더들리 영감의 문제는 그의 과거가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기에, 과거를 담고 있는 재라늄이 깨지면서 그의 삶이 모두 무너진 것입니다.

충실하게 산 삶만이 회고적인 삶이 될 수 있다.”-마사 너스바움

만일 더들리 영감이 과거에 억매이지 않고, 뉴욕 딸집에서 함께 방을 쓰는 14살난 외손자와 교감하고, 그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면, 앞집 ‘제라늄’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난 것은 좀 마음이 아프지만, 그토록 좌절과 낙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사 너스바움은 “오직 충실하게 산 삶만이 회고적인 삶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생의 여기저기 흩어지 조각들을 가지고 서사를 만들거나 발견하는 작업을 하면 우리 삶은 더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회고적 성찰은 단지 과거를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형상화를 통해” 뭔가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더들리 영감의 삶은 과거를 직면하려고만 했지, 딸의 가족과 새로운 선택을 하고 무언가 의미있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구닥다리(old timer)” 영감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마크 프리드만(Marc Freedman)은 그의 최근작 <어떻해 하면 오래 살 수 있을까?(How to Live Forver)>라는 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세대간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함께 사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청소년들이 장년과 노년 세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지역사회의 건강에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실제로 수명을 연장하는 통계적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더들리 영감이 외손주와 함께 살면서 남부 시골출신 할아버지로서 도시아이인 손자에게 낙시와 사냥 등 자신의 경험을 가르치고 살았다면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할아버지외의 전쟁(The War with Grandpa)>(2021)은 오코너 소설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패러디하는 현대판 ‘제라늄’입니다. 혼자가 된 주인공 할아버지(로버트 드니로 분)는 딸(우마 서먼 분)의 권유로 딸가족들과 함께 살게됩니다. 외손자가 쓰던 방을 차지하고 외손자는 다락방 신세가 되자 둘 사이에 갈등 구조가 형성되어 급기야 전쟁에 돌입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애정은 더 깊어지고 아름다운 노년을 즐긴다는 해피 엔딩 이야기입니다.

팀 힐 감독의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amp;lt;그랜파와의 전쟁&amp;gt; 역시, 혼자 남기더니 할아버지가 딸집에 이사와 살면서 외손주 방을 쓰게되자, 할아버지 ‘에드’에게 방을 뺏겨 다락방 신세가 된 손자 ‘피터’.방을 되찾기 위해 할아버지를 골탕 먹이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계속되는 ‘피터’의 도발에 ‘에드’의 반격이 시작되고,방을 사수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데…할아버지와 손주 사이의 세대간의 교류를 통해서 건강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미국판 ‘미수상락眉壽上樂’ 스토리이다..

이제 늙음의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분들이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의 주인공처럼 힘겨운 하루 일상을 살아갈지라도 제라늄같은 꽃 한 송이에서 잠시 천국과 같은 삶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분들에게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어떤 물질적인 대상으로서 각자의 한 송이 들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회상적 감정에만 머무르지 말고, 새로움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이해’ ‘자기 변화’ 그리고 현재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를 통해서 다가올 노년의 아름다운 늙음의 경지,”미수상락(眉壽上樂)”의 삶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오늘 저의 창가에 핀 제라늄 꽃은 이렇게 인간의 삶과 깊숙이 맞닿아 있습니다. 제라늄이란 한 송이 꽃이 하나의 행위자로서 우리의 인생에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향해 온몸을 세운 새빨간 꽃잎, 심장을 닮은 원형 초록 잎사귀의 제라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차이를 넘어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당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그대를 사랑합니다.”

-제라늄 꽃말

https://youtube.com/watch?v=quglprlSQ8k&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