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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

고독서원 2021. 4. 30. 07:10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
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 가운데

김영랑(1903-1950):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서정적민족시인. 본명은 김윤식, 영랑은 금강산의 영랑봉과 영랑호를 보고 그 풍경에 반해 정지용 시인이 지어주었다고 하지요. 휘문고교(좌측 사진)에 입학한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문 사본을 가지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대구 형무소에 6개월간 갇혀 옥고를 치릅니다. 이후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죄 형량이 정해지지 않아 미결수로 풀려나,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던 중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최승희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양가의 반대로 이루어잴 수 없는 사랑이 됩니다. 1930년대에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시활동에 들어갑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백석, 정지용, 김소월과 함께 향토적 서정적 언어조탁의 대가로, 윤동주, 이육사, 변영로, 한용운과 함께 ‘일제 저항시인’으로 평가됩니다. 영랑은 안타깝게 한국전쟁 당시 정지용과 비슷한 시기인 9.28 수복 후에 거리에서 유탄에 맞아 아직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영랑은 2008년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이 받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져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좌측 지리산 바래봉 철쭉, 가운데는 흐르고 있는 섬진강의 청류, 우측은 강진 영랑생가에 활짝핀 모란.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가운데

찬란한 슬픔의 봄”이 가기 전에 반도의 땅끝마을 전남 ‘강진’을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바래봉에 철쭉 보러 집을 나섰다가 섬진강 물빛에 반해 강줄기 따라 내려가다보니 어느새 강진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에 가닿고 말았네요. 아마도 “모란이 지고 말면 내 한해”도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봄을 마중나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들레르는 그의 <악의 꽃>의 피날레 ‘여행(La Voyage)’에서 “진정한 여행이란 떠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번 여행은 명확한 목적이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찬란한 슬픔의 봄”을 보러 길을 떠났습니다.

좌측은 다산이 유배초기 1801년부터 약 5년간 머문 강진읍내의 ‘사의재’ 전경, 가운데가 1805년부터 다산이 머문 강준만은 내려보시는 만복산 기슭의 ‘다산초당’ 그리고 우측은 만복산 백련사에서 멀리 보이는 강진만 정경
강진 백련사에 가시면 ‘만경다원’이란 북카페형 찻집이 있습니다. ‘만복산 백련사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픙경’의 줄임말에서 온 이 찻집에 앉아 멀리 강진만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면 ‘찬란한 슬픔의 봄’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창문 밖 마당에 수백년된 백일홍이 여름 개화를 준비하고 있네요.

강진’하면 만복산 기슭 동백숲에 자리잡은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멀리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절정기에 유배온 “찬란한 슬픔의 봄”과 같은 다산의 마음을 헤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진정한 전성기는 강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정상이 강진의 삶이었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총신’ 다산은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6명의 핵심 제자를 키워 다산학파를 출범시켰고, <목민심서>, <경세유표>,<흠흠신서> 등을 포함한 <여유당전서>를 비롯해서 도합 600여권의 저서를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한자발명 후 최고의 학자이자, 조선조 학문의 최고봉으로 숭앙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배해제 후에도 고향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에서 글을 쓰며 안빈낙도, 유유자적하며 천수를 누리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다산은 중년에 닥친 고난을 “세속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문을 할 수 있는 여가”라고 생각했으며,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 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이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 라고 말할 정도로 강진의 삶은 그를 지금의 정약용으로 만든 “찬란한 슬픔의 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귀양 온 직후 머물게 된 주막집 할머니께서 임시 거처로 머물게한 ‘사의재’ 기록물 가운데

그러나 강진에 봄이 오면 ‘모란에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을 생각합니다. ‘영랑의 생가’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강진에서 자라 시인이 된 영랑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본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뒤 시작에 전념하던 중 숙명여자보통학교 출신 우리나라 ‘전설의 무희’ 최승희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집니다.

영랑의 최승희와의 비련은 문자 그대로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최승희 오빠 최승일의 소개로 만나 사랑을 일궈냈지만, 신여성을 거부한 김영랑 부친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자 김영랑은 자살시도까지 하였습니다. 생가의 동백나무에 목을 매달았다가 다행히 빨리 발견되어 살 수 있었다지요. 김영랑과 혼사가 깨지자, 촤승희는 다시 오빠의 소개로 결국 와세다대에서 러시아문학 공부한 안필승(안막)과 결혼하여 월북합니다. 성악가를 꿈꾼 영랑이 최승희를 사랑한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영랑의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급이었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명인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앵, 김소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생가에 초청하면 고수를 데려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북 연주실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 국악에 대한 사랑을 ‘가야금’ ‘거문고’과 같은 빼어난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시인 박두진은 "한국의 정서, 그 중에서도 국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예를 가진 영랑이 민족의 멋과 그 자신의 멋, 인생의 멋과 그 화합의 묘미를 시로 터득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지요.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제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저지다 휘모라보아 이러케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만갑 : 조선 시대의 이름난 명창 송만갑(1865-1939)>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닫타-요 <컨닥타 : 지휘자(conductor)> 떠밧는 명기인듸 잔가락을 온통 이즈오 떡떡궁! 정중동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잇어 인생이 가을가치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 -김영랑, ‘북’ “북北으로 북北으로 울고간다 기러기 남방南邦의 대숲밑 뉘 휘여 날켯느뇨 앞서고 뒤섰다 어지럴리 없으나 간열픈 실올랙이 네목숨이 조매로아” ​-김영랑 ‘가야금’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혼인 직전에 양가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비련’으로 남습니다. 영랑이 그 사랑의 상실을 시로 옮긴 것이 바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명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서 ‘모란’이 바로 최승희였다고 합니다.

영랑의 생가는 문학인의 생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시비(제목: 모란이 피기까지는)가 눈에 띕니다. 1934년 그 시대 당시 남도의 사투리를 그대로 생생하게 써놓은 것이지요.
모란은 김영랑 시인의 아버지가 꽃보다는 뿌리를 한약재로 사용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1935년에 영랑의 첫 시집이 시문학을 주도하고 ‘떠나가는 배’로 유명한 박용철에 의해 나오는데 편집 후기에 ‘우리의 시는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가 지나가는 걸음에 대충 읽어 치워지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열 번 스무 번 백번 읊어서 저절로 외워졌을 때 느낌이 우러나오길 바란다. 이게 오직 우리의 하나의 바람이다’라고 돼 있다”라고 그들의 시론을 개진했습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가운데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가운데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영랑’이 있고”(이헌구), 평안도에 ‘김정식’이 있다면 전라도에는 ‘김윤식’이 있으며, 이북에 ‘진달래’가 있다면 이남에는 ‘모란’이 있다고 하지요. 변영로의 ‘논개’가 있다면, 김영랑의 ‘춘향’은 그에 못지 않습니다. 북에 백석과 김소월이 향토적 서정성을 맘껏 표현했다면, 김영랑은 박목월과 함께 남쪽의 향토적 서정시를 꽃피운 우리 시문학사의 대표적 서정시인입니다. 어느 비평가는 "언어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과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이헌구)라고까지 영랑을 높이 평가했지요. 영랑은 ‘돌담에 소색이는(속삭이는) 햇발같이’에서 처럼 잘 갈고 다듬어진 언어에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오매, 단풍 들것네’와 같은 시에서 처럼 찰지고 착감기는 전라도 방언에 담아낸 ‘언어 조탁(彫琢, 갈고 닦음)의 대가’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 청류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가운데

이 시에서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이란 싯구에는 정겨운 토속적인 남도 어휘의 조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영랑의 언어적 기교는 그가 좋아했다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이츠(John Keats)의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심성으로 노래하는 탐미주의적 시적 언어와 맞닿아있습니다.

또한 김영랑은 늘 문학의 진실성과 겸허한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후배 ‘신인에게 주는 글’에서 가치있는 작품이란 “인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태도”를 담아 내야한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는 후배들에게 문인의 조국은 문학에 있다고 말하면서 문인은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상기시켰습니다.

김영랑의 시세계를 1930년 3월부터 1935년 11월 『영랑시집』발간까지의 시기를 제1기(초기), 『영랑시집』을 발간한 이후1938년 8월까지의 제1차 절필기를 거쳐 「거문고」와 「가야금」으로 다시 시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1938년 9월부터1940년 9월까지를 제2기(중기),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의 강요에 의한 저항으로 1940년 9월부터 1946년 11월까지의 제2차 절필기를 거쳐 《동아일보》에 「북」을 발표한 1946년 12월부터 1950년 9월까지 사망하기까지를 제3기(후기)로 나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와 같은 시를 통해서 우리는 김영랑을 향토적 서정성을 노래한 순수서정시인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랑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윤동주와 이육사, 한용운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시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후기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춘향의 님을 향한 일편단심 ‘독(毒)’을 품은 시어로 항일 저항시를 많이 썼습니다.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김영랑, ‘춘향’

예컨대, ‘독을 차고’, ‘거문고’, ‘두견’ 그리고 일제하 마지막 시 ‘춘향’ 등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비장하고 결연한 작품들에서는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견결히 유지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랑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며 한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됐던 일제 강점기후반인 1941년부터 광복 이전까지의 문화통치기간에 언어마저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 수 없기에 아에 글을 접고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식민치하에서 '독을 차고' 살며 고독하고 외로왔던 영혼 김영랑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절필을 선언했고, 1940년 ‘춘향’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시 ‘춘향’에서 보여주듯이 조국에 대한 “오! 일편 단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으로서 언어를 빼앗긴 그의 일편단심은 소리를 낼 수 없는 “기린”에 빗댄 시 ‘거문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 못한다.
.......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
문 아주 굳이 다도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 ‘거문고’ (1939)가운데

거문고를 기린에 비유한 영랑의 시적 상상력은 놀랍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 영영 제 곡조를 잃어버린 시인의 처지를 민족 악기 ‘거문고’에 비유하면서, 침묵하는 거문고는 상서롭게 태어났지만 제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동물 “기린”에 빗대었지요. 영랑은 이 시에서 “이리떼”와 “잔나비떼”는 일제 총독부 관리와 친일파 앞잡이들을 각각 상징하며 그들이 득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가락과 선율을 잊은 거문고의 운명은 곧 나라를 잃은 민족 전체의 불행과 맞닿아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엄혹한 상황에도 어떤 고난과 위험이 닥쳐올지라도 “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여”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고 굳게 맹세합니다.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
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毒)을 차고> 가운데

우리말의 감미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고심했던 영랑이 “이리 승냥이” 짐승에게 뜯기더라도 “가슴에 독을” 차겠다 고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처음 시를 쓸 때의 결의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했던 문집 <시문학>의 후기엔 “떠나가는 배”로 잘 알려진 동인 박용철 시인의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시키는 길이다’ —박용철

영랑은 추한 세상에 빌붙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식민 권력에 빌붙어사는 세태를 비관·비판하면서, 자신은 “일편단심” “독을 차고” 자신의 정체성을 “신선히” 지키려 힘썼습니다. 영랑이 초기작부터 유독 '내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 것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갈고 닦아 자연과 세상을 노래하며 식민 상황에 처한 한과 분노의 마음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랑의 시는 키이츠의 “잘 빚은 항아리”처럼 언어로 빚어낸 민족의 정체성의 승화인 것입니다. 그는 이름과 언어마저 빼앗긴 문학적 고립과 고독 속에서 마침내 침묵의 “독을 차고’” 맙니다. 영랑은 1941년 ‘춘향’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올 때까지 붓을 꺽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독’이란 곧 그 정체성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기에 찬 시인의 선언입니다. 그의 ‘독’은 “뼈 있는 지성인의 서릿발 같은 지조”(박두진)이자 “칼날”처럼 빛나는 “섬광”이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영랑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우리 민족이 스스로 일궈낸 독립이 아니라, 주어진 해방과 분단된 조국 현실인식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오! 친구야 현실은 무섭고 괴롭도다.
이 세대에 태어난 불쌍한 천재들이 허덕이다 못해 모조리 변통하지 않았더냐. 사람으로 살려면 오로지 떳떳해야 시원하고, 그러려니 현실이 아프고 그래 우리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가는 게지.’
—김영랑 수필 ‘두견과 종다리’ 가운데

영랑은 조국의 광복은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은 무섭고 괴롭다”고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차고 밝게 조국의 청년들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겨레의 웅혼한 기상을 펼칠 것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 “바다로 가자”에서 영랑은 해방된 조국에 대한 벅찬 기쁨과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현실 참여 의욕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제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구나 큰 바다로 가자구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뚫으리라
큰 호통하고 떠나가자구나
바다 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벗은 넋이로다 풀어놓인 겨레로다
가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기별
머리 위엔 그득 보배를 이고 오렴
발 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김영랑 ‘바다로 가자’

그러나 해방정국의 불안한 분단 상황을 본 영랑은 완전한 자립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탈식민 상황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여기며 괴로워 하다가 1950년 한국전에서 유엔군에 맞서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쏜 유탄에 맞아 48세를 일기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합니다.

이렇듯 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은 초기에는 ‘이루지 못한 비련의 사랑’이었다가, ‘언어마저 빼앗긴 식민 현실’이기도 하였으며, 그리고 ‘미래가 불투명한 해방정국의 조국의 불안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랑의 시를 읽는 우리가 이제 보내야만하는 “찬란한 슬픔의 봄”은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봄이기도 할 것입니다.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은 역사의 강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듯 모두의 “찬란한 슬픔의 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슬픈 봄을 지나 우리들의 ‘모란’이 다시 활짝 피어날 것을 믿습니다.

———————
어느덧 오월입니다. 영랑의 ‘오월’을 같이 읽습니다.

‘오월’

들길은 마을에 들다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만(萬)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문장>(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