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까치 설에는 모네의 고독한 ‘까치’와 함께

고독서원 2021. 2. 11. 10:29

‘설’이라는 아름다운 말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우리 민족의 명절 ‘설’이 다시 오고야 말았습니다.

‘설’이라는 말에는 유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 슬기로운 겨레의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아쉬움과 바램, 새로운 시작과 계획,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복합적이면서도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설’이란 단어에는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아쉬워하고 서글퍼 하는 ‘섦다’와 새 해의 첫날에 아무 탈 없이 한 해를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을 담은 ‘말삼간다’는 뜻,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설다, 낯설다’의 의미. 그리고 한 해를 새롭게 계획하여 세운다는 뜻의 ‘서다’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또다시 한 살을 먹는다는 ‘나이’의 뜻을 지닌 우리말의 매우 풍부하고 복합적인 의미가 서려있기 때문입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요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고도 하는데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에서 비롯되었지요.

하지만 ‘까치설’의 유래를 ‘작은 설’이라는 뜻을 가진 옛말 ‘아찬설’ 혹은 ‘아치설’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 ‘아치설’의 ‘아치’가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비슷한 ‘까치’로 잘못 전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까치설'은 설날의 전날, 즉 섣달 그믐(음력 12월 31일)을 말합니다.

‘작은설'이라고도 불리는 ‘까치 까치 설날’에는 미리 설빔으로 갈아입고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다니곤 했습니다.

설날에는 외지에 사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전날은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을 알리려는 까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까치설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가 된 것이지요.

예전에는 까치 설날에는 가족과 친구들 뿐만아니라, 제자들과 직장 동료들도 삼삼오오 모여 스승과 직장상사의 집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고 윷놀이를 하며 덕담과 우애를 나누곤 하였지요.

지금은 그런 풍경이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인데다, 올해는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 가족 친지들조차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확산과 신자유주의의 일상화 그리고 펜데믹은 우리들의 감정과 사랑 그리고 관계의 지형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지난 주 입춘에는 흰눈이 펄펄 내렸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제 기억 속으로 사라진 관계과 풍속에 젖기도 하였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온통 하얘졌습니다. 카톡을 열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뵙지 못한 대학 은사님께서 ‘모네의 까치’ 그림에 대한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입춘이 지나도 흰눈과 함께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설날이 다가오는 ‘춘래불사춘’ 지절에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 끌로드 모네가 그린 ‘까치’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단상을 함께 나누신 것입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년 11월 14일 - 1926년 12월 5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다.그의 작품 《인상, 일출》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탐색했다. 말년의 《수련》 연작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5월 ‘스승의 날’에는 시인 정호승의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봄날’이란 시를 보내주시며 코로나로 뵙지 못하는고독하고 외로운 제자를 위로해주시더니, 이번 설명절에는 모네가 그린 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눈꽃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는 한마리 ‘까치’에서 제자의 고독과 외로움을 읽어내셨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대학원 시절 선후배들과 함께 까치설날에 은사님 댁을 일주하며 세배하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설 즈음에 선생님께서 ‘모네의 까치’가 생각나신 것은 아마도 오래전 제자들과 오손도손 함께하셨던 그 ‘까치 까치 설날’이 그리우셨던 모양입니다. 제자들도 그 희미한 옛사랑이 그립습니다. 문득 최근에 본 영화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덧없이 흐르는 인생에서 붙잡아야만 할 순간이 있다.

Life is fleeting. It has moments that you should seize.

영화 <더 디그 The Dig>

모네의 그림과 함께 선생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

모네의 그림 ‘까치’에 대하여


입춘이 어제였는데, 간밤에 함박눈이 함빡 내렸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문득 모네 (Claude Monet)의 ‘까치’를 생각나게 한다.

나는 이 ‘까치’ 라는 그림을 좋아한다. 신년 카드나 사진으로 가끔 보았지만,산문시처럼 빼어난 산문그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화가 파리 오르세 박물관 (The Musee d'Orsay)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해서 미쳐 가보지는 못했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은 프랑스 파리 센 강 좌안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소장품 중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19세기 인상파 작품이 유명하다.원래 오르세 미술관의 건물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를 맞이해 오를레앙 철도가 건설한 철도역이자 호텔이었다.

내가 이 유화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하얀 눈이 햇살을 받으면서 솜 같이 폭신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막대로 엉성하게 만든 울타리 문짝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서 고독을 즐기는 장면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새야말로 수필 같은 그림 속의 솔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설경의 구도가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뒤로 보이는 바다가 그렇고,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낮은 울타리가 그렇고, 그 뒷집 지붕 꼭대기가 그렇다. 앞마당은 물론이고 문짝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하늘마저 뽀얀 흰색이다.

그런데 이렇게 온 누리를 덮은 하얀 눈 위로 젊은 겨울 햇살이 비친다. 연노란 햇살이다. 이 햇살은 모든 사물에 크고 작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실물보다 그림자 키가 큰 것으로 보아 뒤에서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틀림없다. 그 햇살은 그러면서 그림자마다 새로운 색깔을 연출한다. 풍성한 흰 눈 위로는 연노란 색을 살짝 칠하고, 키를 다듬은 울타리 나무들은 연푸른 보라색 그림자를 만들어 놓는다.

나는 언젠가 이런 함박눈이 왔을 때 혼자서 고향으로 어머니 산소를 찾은 적이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거기 야산에는 발이 빠지는 두툼한 눈 위에 적막한 고요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가끔 들릴 뿐이었다. 바로 그런 태고의 고요함을 나는 지금 이 그림 속에서 직감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까치. 엉거주춤 서 있는 울타리 입구 문짝 위에 한 마리 까치가 앉아 있다. 수다쟁이 까치는 말동무가 필요할 텐데 어찌 혼자다. 외로움을 타는 까치는 아닌 듯싶다. 외로우면 혼자 있기가 괴로워 진작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고독을 즐기는 고독한 까치일 것이다. 고독은 혼자임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고독한 존재는 무엇을 즐기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고요한 세상 속에서 찬란한 색깔의 변화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마치 ‘0’처럼 모든 것을 시작하는 하얀색은 신선한 햇살을 만나 갖가지색깔을 창조하고 있기 않은가. 이 까치는 흰 눈 위에 햇살이 남긴 따뜻한 노란색을 사색할 것이다. 사물이 드리운 보라색 그림자를 음미할 것이다. 울타리 나무가 남긴 바이올렛 색깔은 그의 흥미를 더해줄 것이다. 등지고 있는 바다는 이런 설경의 배경 역할을 잘 하고 있다. 뽀얗게 파란 하늘도 그렇다. 자기가 앉아 있는 문짝 그림자는 흰색을 만나서 말갛고 명료하다. 상큼한 차가움 속의 따뜻한 설경이다.

다시 까치를 생각한다. 이 까치도 짙은 감색 몸체에 새하얀 가슴과 날개깃을 달고 있다. 까칠한 검은 새와는 구별되는 멋쟁이다. 이렇듯 제 몸과 그림자를 함께 갖춘 이 까치는 또 다른 사색으로 고독을 감내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서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 변해가는 흔적을 한눈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 키가 작아지다가 이제 그 모습이 또렷해졌다. 시간의 무상함까지도 깨닫고 있는지 모른다. 상당한 시간동안 머물고 있으면서 두리번두리번 자신의 지난 흔적을 살폈을 것이다.

이러해서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흰 눈과 관련된 모네의 그림이 100여 편에 이른다지만 나는 햇살과 흰 눈의 교섭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까치의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좋아하다. 홀로 고독한 그 까치가 언제 외로워져 그 허술한 막대 문을 떠날지 나는 사실 모른다. 이 새가 정말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릴 수 있을까? 눈이 저토록 온통 하얀데.

-글, 이성호 (한양대 명예교수, 영문학)



동서양의 까치 동요

https://youtube.com/watch?v=qNtWt2U6Jbk&feature=share



‘까치 까치 설날’

— 윤극영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 하셔요

우리집 뒤뜰에는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까고 호두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을 뛰고
나는 나는 좋아요 참말 좋아요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동생 울지 않아요
이집 저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슬픔 하나의 까치(One for Sorrow)’


“슬픔 하나의 까치
기쁨 둘의 까치
결혼 셋의 까치
탄생 넷의 까치
은 다섯의 까치
금 여섯의 까치
결코 말해선 안될
비밀 일곱의 까치
소원 여덟의 까치
뽀뽀 아홉의 까치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새 열의 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