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자유롭고 고독한 영혼: 몽테뉴가 필요한 시간

고독서원 2020. 9. 14. 15:53

“악惡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영혼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되찾아 자기 안에 가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언어의 ‘랩소디’라 평가받는 미셀 드 몽테뉴의 <에세 Essais>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한다. 그곳은 자신과 일상적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고독 한복판에서 스스로 군중이 되어라.”(타이뷸러스 Tibullus)

“몽테뉴가 비난한 유일한 것은 독선과 자만이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몽테뉴의 글은 우측 Everyman’s Library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한 <Michel de Montaigne The Complete Works: Essays, Travel Journal, Letters>(2003), 도널드 프래임(Donald Frame) 번역을 참고하였음. 좌측은 몽테뉴의 프랑스판 에세이 모음집 <에세Essais>, 우측은 가까운 선배가 애독하는 펭귄판 <Michel de Montaigne: the Complete Essay>

9월 13일은 우리에게 <수상록>으로 알려진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그리고 ‘겸손한 회의론자,’ 미셀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가 타계한 지 정확히 428년이 되는 날이다. 몽테뉴는 1533년 2월 28일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에서 태어나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 지역에서 살다가 1592년 9월 13일 지병인 신장결석으로 인한 염증으로 목이 부어 질식 사망했다. 몽테뉴는 우리같으면 한 창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나이인 37살에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하여” “뮤즈의 여신의 품”으로 은퇴하여 장장 20년이란 세월 속에 107개의 짧고 긴 수필 형식으로 역은 그의 회심작 <에세 Essais; 수상록>(1570~90)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알고 있는 지를 알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회갑이 되기 직전인 59년이란 세월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몽테뉴는 그의 단 한 권의 책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유롭게 써내려감으로써 호머, 플라톤, 단테, 세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적 지성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글의 주제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를 평생 화두로 삼고서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성찰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글쓰기라는 삶의 최고의 기술을 자신을 지켜내는데 바쳤던 것이다.

세계적인 세익스피어 학자인 하버드 대학 영문과의 스티븐 그린블라트(우측 사진)는 세익스피어가 몽테뉴의 글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그의 저서 <세익스피어의 몽테뉴>(2014)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코로나 전염병의 제2차 대유행, 50일이 넘는 유례없이 기나긴 장마, 그리고 2주일 동안 정신없이 몰아친 세번의 태풍 탓에 ‘집콕’ 생활을 하는 동안에 우연히 몽테뉴의 <에세>를 읽었다.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몽테뉴의 책을 손에 들게 된 까닭은 최근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두 인생의 선배를 통해서 였다. 정년을 앞두고 드라마 연구와 시인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평소 존경해온 학회에서 인연을 쌓아온 A 선배께서 어느 날 김선생 “나 요즘 몽테뉴를 읽고 있어요.”라며 스쳐지나가듯 툭 말을 던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몽테뉴? 몽테뉴라!’ 철학자 니체가 “몽테뉴가 글을 씀으로써 이 지상에서 사는 기쁨이 늘어났다(the delight of living on this earth increases owing to Montaigne’s writing.)”고 말한 몽테뉴? 니체가 "만약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와 함께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말한 그 몽테뉴? 그리고 또 니체가 “영혼 중에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위대한 영혼”이라고 말한 바로 그 몽테뉴! 그래 이 시간의 감옥에 살면서 코로나 시대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어디 나도 한 번 몽테뉴를 읽어보기로 하자.”고 하며 야심차게 그를 읽기 시작하였다. 세익스피어부터 윌리엄 해즐리트를 지나 버지니아 울프의 이르기까지 영문학의 거장들을 사로잡은 프랑스 작가 몽테뉴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기에 영어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도 영문학 전공으로서 궁금하기도 하였다.

좌측에서부터 페트라르카, 몽테뉴, 짐머만으로 이어지는 고독의 계보

사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청소년기에 세계명작선 서가에 꽂힌 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냥 지나쳐 버린 고전이었다. 그러다가 몽테뉴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나마 새롭게 생긴 것은 지난 2019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고독과 외로움을 강요받기 이전에 ‘고독과 외로움 연구소’란 작은 블로그 집을 지어 사람들의 ‘고독과 외로움’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해서 읽는 과정에서 몽테뉴가 ‘고독의 계보학’에 중요한 맥을 잇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이 <고독에 관하여(On Solitude)>는 서양 철학의 고독의 계보학 가운데 14세기 프란시스 페트라크(Francis Petrach)의 <고독한 삶(The Life of Solitude)> (1346-56)과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요한 짐머만(Johann Georg Zimmerman)의 <고독(Solitude)>(1798)사이에 매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몽테뉴는 바로 거기까지 였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여전히 가실 줄을 모르고, 장마가 끝날 줄을 모르는 채 여름이 지나갈 무렵, 위협적인 태풍 3개가 줄을 이으며 집콕 생활로 고독이 더 깊어지고 있을 무렵 그 여름의 막바지 어느 날, A선배와 함께 걷기 모임에서 알게된 연배가 있으시면 경륜이 깊으신 B 선배께서 최근에 이사하셨다며, 새로 마련된 당신의 “서재를 정리 중이시라며(unpacking my library)” 아래와 같은 사진을 한 장 보내주셨다.

좌측이 선배께서 보내주신 서재(가운데 책상 위에 ‘발고여락’이라는 한자가 보인다)의 정경이고, 우측 그림이 16세 몽테뉴 서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원형 서재

서재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봄직한 서재가 생각이 났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한 끝에 몽테뉴 탑의 서재가 떠올랐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채 정면에 창문이 나있고 가운데 책상이 놓여져 있는 구도가 각이 좀 져 있을 뿐 몽테뉴의 서재 스타일이었다. 특히 선배의 책상 위에 보이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란 사자성어가 문득 바로 몽테뉴의 삶을 가장 동양적인 수사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몽테뉴의 삶이야 말로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의 삶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이것을 바로 마음이 통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해서 한 선배가 무심코 “몽테뉴를 읽고 있다.”는 말로 촉발된 몽테뉴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선배가 보내준 사진 한 장 속에 있는 ‘발고여락’이란 문구로 인해 몽테뉴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래처럼 의식의 수면으로 솟아 오른 셈이다. 결국 몽테뉴는 한 선배의 무심결에 던진 말과 또 다른 한 선배가 일상의 삶을 보내준 사진 속의 작은 글로 내게로 온 것이다.

먼저, 몽테뉴를 읽은 소감은 한 마디로 “화중복” 이다. “화중복”이라는 말은 <삼국지>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제갈공명의 화공으로 전멸할 찰나에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화를 면하고, 마침내 사마의가 3국을 통일한다는 의미이다. 사마의는 아마도 노자의 도덕경에 “禍兮福所依 福兮禍所伏(화혜복소의 복혜화소복)”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즉, “불행은 복이 의지해 성장하는 곳이고, 복은 재앙이 숨어있는 곳이다.”라는 뜻이다. 집요한 코로나와 기록적인 장마 그리고 세겹의 태풍이라는 ‘재난’ 속에서도 별빛처럼 빛나는 몽테뉴의 글을 만난 것은 다름 아닌 “화중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영어로 ‘재난(disaster)‘말이 “별이 사라진 하늘”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이 소감처럼 몽테뉴 독후감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은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몽테뉴의 글이 특별히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그의 글과 사유가 단지 자연적 재앙 속에 길을 밝혀줄 뿐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분열과 갈등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일깨운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몽테뉴 자신이 살아온 16세기 유럽은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흑사병이란 전염병이 수많은 생명을 닥치는 데로 앗아가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교와 구교의 종교적, 정치적 분쟁과 다툼으로 세상이 온통 혼돈과 무질서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까닭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몽테뉴가 살던 시대처럼 우리나라도 코로나 재앙과 이념적 갈등과 분열로 나라가 혼돈과 무질서로 향하고 있으며, 국가의 법치주의 근본은 송두리째 무너졌고, 국가재정 또한 파탄 직전에, 엄청난 청년 실업률과 세계 최저 출산율 그리고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삶을 제한하고 국가 재정을 남용하는 국가주의적 지배체제로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암울하고 참혹하기만 하다. 설상가상으로 진보의 가면을 쓴 초엘리트들의 교육과 병역특혜는 절대 다수의 ‘흙수저’들을 붕어, 개구리, 가재로 취급하는 현실을 목도할 때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 프랑스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츠바이크의 초상과 그의 몽테뉴 전기 <위로하는 정신>

우리 시대에 불어닥친 코로나와 이념적 대립의 광풍은 우리로 하여금 몽테뉴가 보여준 관용과 중재, 겸손과 정직, 고독과 성찰이 필요한 시대임을 일깨운다. 우리 시대의 분열과 다툼, 오만과 독선, 거짓과 위선의 시대에 몽테뉴가 필요함을 상기시킨 사람은 바로 다름아니라 슈테판 츠바이크이다. 그는 나치 전체주의를 온 몸으로 버텨내며 살다가 끝내 자살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태계 작가이다. 츠바이크는 그의 유작이 된 미완성 원고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원제 : Montaigne)>(유유 간, 2012)에서 그가 젊은 시절 전혀 이해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몽테뉴의 글이 어떻게 뒤늦게나마 나치를 피해 브라질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새롭게 읽혀졌는 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직은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몽테뉴)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가 어렵다.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제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함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 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21쪽) 츠바이크는 호머, 세익스피어, 괴테, 발작과 톨스토이처럼 세대와 시기에 관계없이 항상 열려 있는 작가들과 달리 “특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작가가 있다.”고 말하며 몽테뉴가 바로 그런 작가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고난을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몽테뉴의 지혜와 위대함을 존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 그럼, 몽테뉴의 글이 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를 논하기 전에 그의 글의 형식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기로 하자. 그의 <에세>는 우리에게는 <수상록>으로 더 잘 알려졌다. ‘수상록’하면 명상집이나 수필집을 떠올린다. 그러나 몽테뉴의 ‘에세(essaie)‘는 흔히들 말하는 ‘에세이(essay)’하고도 다른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이다. 프랑스어로 ‘에세에(essayer)‘는 ‘시도하다’ ‘시음하다’의 뜻으로 어떤 것을 ‘에세이’ 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시험하거나 맛본다는 뜻이거나, 휘저어본다는 뜻이다. 프랑스 와인의 본산이 보르도가 고향이고, 포도밭은 소유하면서 와인을 생산한 몽테뉴가 그곳에서 집필한 책의 제목으로 쓴 '에세essais'는 그 당시 '맛보다' '시음하다'라는 뜻이었다 한다. 그러니 이 책은 '몽테뉴의 인생 맛보기' 혹은 '몽테뉴의 삶을 맛보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서 몽테뉴의 “에세”란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신만 돌보며 나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분석하고 음미함으로써 자신이 본질이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있는 지에 대한 그 자신의 판단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앙티엔 콩파뇽의 <인생의 맛: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몽테뉴를 읽기 전에 간단히 몽테뉴의 글의 특성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1세기 몽테뉴의 재탄생에 크게 기여한 사라 베이크웰(Sarah Bakewell)은 그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 How to Live)(2011)에서 17세기 한 몽테뉴주의자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총알이 잘 나가는 총을 쏘아보는 것”이나 “말이 잘 달리는 지 말을 타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그만큼 방향을 예측불허하는 자유로운 글쓰기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몽테뉴가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16세기에 1인 문학혁명을 일으킨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문체적 특성은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글은 구어체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다. 둘째, 진솔하다. 셋째, 힘차고 시적이며 유쾌하고 과감하다(로레르토 올레토). 또한 몽테뉴의 <에세>를 두고 하는 말 가운데, “자화상”이라는 말과 “평생을 두고 읽는 인생의 동반자같은 책”이라는 말이 있다. 또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읽는 사람마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아니면, “이 책은 마치 내가 쓴 책과 같다”고 할 정도로 독자들의 ‘최상의 친구’가 되었다.

사라 베이크웰의 몽테뉴 전기 <How to Live>(2011)

몽테뉴의 글의 미덕은 그가 끊임없이 전염병과 종교적 정치적 분열과 갈등 속에서도 관용과 중도의 자세로서 “내면적인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데 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바로 유명해진 몽테뉴는 그의 사후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로마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를 정도로 그 사유의 거침없이 자유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그래서 몽테뉴를 “영혼 중에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위대한 영혼”(니체)의 소유자로, “개인의 자유를 상실하고서야 비로소 가슴에 와”(츠바이크) 닿은 지성으로서 “권력,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소중한 본질인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겪어본 사람만이 집단적 광기(herd insanity)의 시대에 내면적 자아를 유지하는 데 용기와 정직, 투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와 전체주의”(윤석렬)의 ‘광풍’(한상훈)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라도 몽테뉴의 다시 읽기는 필요할 듯 하다.

몽테뉴가 평생 미워한 것은 자유에 대한 경외감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삶과 세상을 자신들이 신봉하는 학설이나 이념이나 체계 안에 가두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판단과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자기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강요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범죄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독재에 ‘미친 자들’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이념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다는 것을 우기거나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가장 경멸하였다. 따라서 분열과 갈등, 오만과 독선, 좌절과 절망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몽테뉴의 고독과 희망과 화해와 관용이었다.

“고독한 군중, 몽테뉴가 필요하다.”

몽테뉴는 <에세> 1권 39장 “고독에 관하여” 에서 로마의 타이불르스Tibullus를 인용하며, “고독 한 복판에서 스스로 군중이 되라 In solitude be to thyself a throng”고 역설적으로 말하면서 “악惡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영혼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되찾아 자기 안에 가두어야 한다. 도시 한가운데서나 궁정에서도 누릴 수 있는 고독이지만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더 만끽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한다. 그곳은 자신과 일상적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공간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시간과 만날 수 있었다. 읽는 힘이 변화의 동력이고 새로운 기회의 원천이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책은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읽기 위해서는 집중하고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 나만의 공간은 서재와 도서실과 같은 혼자만의 공간일 필요는 없다.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듯이, 사람들 속에서 나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이 나만의 공간에서 독서와 사유, 음악 감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자신을 재무장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 고독의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금 상실과 고난을 극복하고 전락에서 회복으로 회복에서 전유의 길로 나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자유와 평온을 먼저 지켜내야한다는 것이다.

“좌절과 절망을 모르는 희망의 전도사, 몽테뉴가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좌절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몽테뉴는 6명의 자녀들 가운데 5명이 어린 시절에 죽는 것을 견뎌야만 했던 ‘참척’의 슬픔을 버텨내고 살아야만 했던 당사자였다. 또한 어린 자녀들의 연이은 죽음과 함께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그의 절친이자 세계관을 함께 나누었던 라 보에시(La Boetie)의 때 이른 죽음은 몽테뉴를 깊은 슬픔으로 에워싼 “캄캄하고 음울한 밤”의 나락으로 빠지게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 평생 신장결석을 앓았고, 말에 받혀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의 분열과 다툼 속에서 이렇게 죽음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테뉴는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글쓰기를 통해서 죽음의 공포와 상실과 고난을 이겨냈다. 청춘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고, 건강이 없어져야 그 귀중함을 알고,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핵심인 자유를 뺏기는 중이거나 이미 빼앗긴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귀함을 안다는 것이 인생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고 남은 여생을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글을 쓴 사람이 바로 몽테뉴였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용기있는 중재자, 몽테뉴가 필요하다.”

몽테뉴가 자신을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은둔한 고독한 존재로 묘사하지만, 사실 그는 당대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인이었으며, 역사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 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앙티엥 콩파뇽은 <인생의 맛>에서 몽테뉴를 “카톨릭교가 개신교, 앙리 3세와 앙리 드 나바르(후에 앙리 4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음을 이야기 한다. 특히 <에세> 3권 1장 “효용과 명예에 관하여 of the useful and the honorable” 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우리를 갈라놓는 이 거듭되는 분열 속에서 나는 미흡하나마 왕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결과 그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가면으로 그들을 대하는 일은 용케 피했다. 이 직업군이 종사하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이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가장하지만, 나는 생생한 내 의견을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내보인다. 자신을 속이기보다는 일을 그르치는 편을 택하는 말랑말랑한 풋내기 중재자라고 할까. 그럼에도 지금까지 요행히도(정말 운이 크게 작용했다) 나만큼 의심을 덜 받으면서도 호의와 친밀감을 이끌어내며 이편과 저편을 오가곤 사람과 드물다. 나는 사람을 처음 사귈 때 마음을 터놓는 태도로 상대에게 쉽게 그녀들만의 상호신뢰를 구축한다. 순박함과 진실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 통용된다.
In what little negotiating I have had to do between our princes, in these divisions and subdivisions that tear our nation apart today, I have studiously avoided letting them be mistaken about me and deceive by my outward appearance. Professional negotiators make every effort within their power to conceal their thoughts and to feign a moderate and conciliatory attitude. As for me, I reveal myself by my most vigorous opinions, presented in my most personal manner — a tender and green negotiator, who would rather fail in my mission than fail to be true to myself. However, up to this time it has been with such good luck(for certainly fortune has the principal share in it) that few men have passed between one party and another with less suspicion and more favor and privacy.
I have an open way that easily insinuates itself and gains credit on first acquaintance. Pure naturalness and truth, in whatever age, still find their time and their place”(p.727-8)

그리고 이와 같은 분열과 음모, 의심과 혼돈 속에서 몽테뉴는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도 대해서 3권 8장 “토론의 기술에 대해서 Of the Art of Discussion”에서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협상이란 대화와 토론이다. 그는 자신을 타인의 생각에 우호적이고 열려 있고,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 자기 의견 속에 갇히지 않고 고집스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었건 진리라면 무조건 환영하고 보듬으며, 멀리서라도 진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면 즐거이 항복하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또한 지나치게 위압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면 비판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대개의 경우 수정해야 한다는 필요성보다는 예의상의 이유에서 비판자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격려하려고 한다.
I give a warm welcome to truth in whatever hand I find it, and cheerfully surrender to it and extend my conquered arms, from as far off as I see it approach. And provided they do not go about it with too imperious and magisterial a frown, I lend a hand to the criticism people make of my writings, and have often changed them more out of civility than to improve them, loving to gratify and foster my critics’ freedom.....”(p857)

프랑스 파리 소르본느 대학 앞에 있는 몽테뉴 동상, 세계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그의 자유와 관용의 프랑스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그의 오른발을 만진 자리가 눈에 띤다.

“차이를 넘어선 관용의 화신, 몽테뉴가 필요하다.”

몽테뉴가 살았던 유럽의 16세기는 같은 그리스도교지만 서로 믿음과 관습이 다른 두 종교 집단은 그 어느 쪽도 양보가 없었기에 피를 부르는 전쟁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른바 종교전쟁이다.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내전인 위그노 전쟁과 같은 종교분쟁은 이미 신앙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집단적 광증의 표현이었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즉 신앙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전쟁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몽테뉴는 이 집단광증의 시대에 관용(톨레랑스)과 타협과 온건함을 옹호하고 끝까지 실천하려 노력했던 인문주의였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르의 앙리의 사절이 되어, 앙리 3세에게 그의 개종 결심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낭트칙령(1598)을 발표하기 이전 나바르가 앙리 4세 프랑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몽테뉴가 중요한 중개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바로 대립과 전쟁의 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몽테뉴의 관용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낭트칙령: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은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화합을 도모하였다. 낭트 칙령은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를 주었으며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첫 사례로 꼽힌다. 이와 같이 차이를 넘어선 관용과 화해의 프랑스 정신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몽테뉴였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조각가 질 램버트 고데샤를Gilles-Lambert Godecharle (1750-1835)의 몽테뉴의 테라코타(점토상). Our bust depicts the French Renaissance philosopher and essayist Michel de Montaigne, at a mature age, with a studious gaze and a characteristically long beard. This well preserved terracotta was made by Gilles-Lambert Godecharle, as a model for his bust of Michel de Montaignee for the garden of the Château de Wespelaer (near Leuven, Belgium), now at the Musée d’art Ancien (Musée Royal des Beaux Arts, Brussels; inv. 3496).

“중용과 융합의 자유시민, 몽테뉴가 필요하다.”

끝으로, 몽테뉴는 “중용의 인간 혹은 융합의 인간이 되어 거리낌 없이 사방을 바라보면서 모든 점에서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 사상가’이며 ‘세계 시민’이었으며, 어느 한 민족과 한 조국의 아들과 시민이 아니라,자유로운 관용정신을 가지고 나라와 시대를 초월한”(츠바이크)자유로운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분열과 다툼, 오만과 독선, 거짓과 위선이 난무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몽테뉴의 자유, 관용, 겸손, 중용, 그리고 “엄격한 자기 점검과 성찰로 이어진 수행의 여정(旅程)”으로서 무심무욕한 마음의 평정(平靜; 아타락시아ataraxia)으로서 ‘고독’의 향유이다.

———————
추신: 몽테뉴가 필요한 이유 하나 더

몽테뉴는 말년에 <에세> 3권 3장에서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게되는 “세가지 사귐에 대해서(Of three kinds of association)”말한다. 그것은 첫째, 동성간의 교제(우정, 사상), 둘째, 이성간의 교제(사랑, 쾌락),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책과의 교제이다. 전자의 두가지 교제는 우연적이며 다른 자에 매여 있어, 우정은 얻기가 힘든 것이 문제이고, 사랑은 나이와 더불어 시들해 버린다. 그래서 이 두가지는 우리 인생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마지막 책과의 교제는 훨씬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한다고 이야기 한다. 책은 우정과 사랑보다는 실제적이고 생생한 쾌락과 감각을 주지는 못하지만 배반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고 늘 한결 같은 얼굴로 우리들 곁을 지킨다. 몽테뉴는 이렇듯 사소한 일상적 삶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몽테뉴는 저울의 상징이 새겨 있는 메달을 만들어서 한쪽에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문구를 새겨넣어 평생 그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다.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탐구’야말로 몽테뉴가 그토록 존경했던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가 <에세>에서 말하고 있듯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 ‘나’다워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몽테뉴를 가르켜 프랑스의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것이다. 몽테뉴를 생각하면서 최근 오랜 침묵을 깨고 신곡을 발표한 나훈아 옹의 “테스형”을 함께 들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6HWxLhoF-40&feature=share



“네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형! 가사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