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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산사, 상원사의 봄은 어디에?

고독서원 2021. 4. 21. 17:11

“우리들의 청정한 도량에서 불협화음을 몰아내야겠습니다.
문명의 소음에 지치고 해진 넋을
자연의 목소리로 포근하게 안아주어야겠습니다.”

-법정-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상원사는 서기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慈藏)이 지었다.상원사는 세조의 불치병을 치유한 문수보살과 ‘천음회향’’이라는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입구에 ‘청정한 도량’을 뜻하는 청량다원이 있고, 안쪽 해우소 가는 길에 ‘아름다운 책이 숨쉬는’ 서점이 있다.

‘치유의 산사’ 오대산 상원사에 다녀왔습니다. 상원사가 치유의 절이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조선 세조가 등창이 심해 상원사 계곡물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한 동자가 등을 씻어주었지요. 세조가 그 동자에게 “어디가서 임금 등을 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마라” 하자, 그 동자는 세조에게 “어디가셔서 문수동자가 등을 씻어주었다 말하지 마십시오”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조의 피부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합니다.

5월에도 눈이 온다는 상원사의 계절은 4월이 하순으로 가는데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인적은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산사 입구에 파란 하늘에 뜬 둥근 달 모양의 디자인을 입은 상원사 팻말이 있고 저만치 ‘오대서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약을 읽으며 마음의 다짐을 한 뒤 계단 앞에 서니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란 문구가 있더군요.

번뇌를 다스리며 갓길에 피어난 꽃잔디를 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청풍루 현판에 ‘천고의 지혜 깨어있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번뇌를 떨치고 오른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 문을 지나면 다시 ‘문수전’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이 나오고 우측에는 오대산의 본디 이름 ‘청량산’에서 빌어온 ‘청량다원으로 가는 작은 계단이 있지요.

청량다원에 들어가니 조용하니 잔잔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주인장의 권유에 따라 처사들이 즐겨마신다는 ‘오대산 기운차’를 마셨습니다. 버섯을 오랫동안 우려 달인 차로 혈액순환에 좋다면서 권하더군요. 차맛과 향에 취해 두 잔이나 마셨는데, 주인장께서 도량이 얼마나 청정한지 두번째 잔은 보시라시면서 그냥 내주었습니다.

‘차경’있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가져간 책을 탁자 위에 피고 향기로운 차와 함께 잠시 독서삼매를 즐겼습니다. 정면에 문수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5층석탑을 둘러싸고 어느새 초파일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청량다원’이란 찻집의 이름을 생각하니 문득 ‘청정한 도량’을 이야기한 법정스님의 오래전 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들의 청정한 도량에서 불협화음을 몰아내야겠습니다.
처마 끝에서 그윽한 풍경소리가 되살아나도록 해야겠습니다.

문명의 소음에 지치고 해진 넋을
자연의 목소리로 포근하게 안아주어야겠습니다.”

-법정-

그렇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오늘 이곳 상원사를 찾은 연유를 알게되었습니다. 그간 문명의 소음에 너무 지쳐 있었나봅니다. 그리고 오대천 따라 깊은 산중 자연의 포근한 품에 무척이나 그리웠었나봅니다.

책을 읽다가 잠시 경내 산책을 하러 나갔더니 ‘천음회향’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아름다운 종”이 침묵의 소리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종소리가 하늘의 소리가 되어 향기로 메아리친다”더니 종의 울림이 침묵의 향기로 남아 산사를 에워싸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해우소로 가는 길목에 서점이 눈에 들어와 들어가보니 법정스님 10주기를 기념하여 미발표된 문집 <낡은 옷을 벗어라>(2020)가 있기에 들고 나왔습니다.

주로 1965년부터 69년까지의 미출간 원고를 묶은 이 책에서 법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지나가면 봄철이 온다는 이 엄연한 우주질서를 이제 더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새로운 계절 앞에서 그만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려는가?”

차를 다 마시고 행장을 챙겨 법정스님의 발걸음을 따라 마음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하산하는 길에 오래된 나무아래에 수줍게 핀 아름다운 들꽃 몇송이를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눈을 끄는 것은 약용으로 쓰인다는 파아란 종달이 머리 깃을 닮은 ‘현호색’과 보라빛 질투의 화신이라는 ‘얼레지’였습니다.

비밀’이란 꽃말을 지닌 ‘현호색’ 코리달리스(Corydalis)’는 그리스어의 종달새라는 어원이고 현호색(玄胡索)의 속명 역시 종달새에서 유래했습니다. 현호색 꽃 모양은 날렵하고 긴 주머니가 달린 형태가 종달새 머리의 깃과 닮아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봄 산행 중 산기슭에 현호색이 꽃망울을 터뜨려 봄 정취를 더해줍니다. 이름에 대해 이설이 많은데 ①뿌리가 검은 빛이라 현(玄), ②북방식물이라 호(胡), ③잎이나 꽃이 서로 꼬여 색(索)이라는 글자들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국내 최초 신약 '활명수'에도 현호색 성분이 들어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불타는 질투’라는 꽃말을 지닌 봄꽃의 여왕, 얼레지, 꽃모양이 화려하고 슬퍼보여 엘레지를 잘못부른 줄 알았는데, 얼레지라 부른다고 합니다. 영어로 ‘개이빨 제비꽃(Dog-tooth Violet)’ 혹은 가재무릇이라고도 하고요. 3-4월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에서 자라지만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것도 있지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현호색과 얼레지를 정성스럽게 집에 모셔왔습니다.

정말 올라갈 때 못 본 그꽃을 내려갈 때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꽃들을 보니 마음이 정말 청량해져 자연의 맑고 향기로움이 포근하게 감싸안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멀리 하늘을 보니 도회지의 잿빛 황사 하늘과 달리 이곳의 하늘을 문자 그대로 ‘청정’했습니다.

이 푸르른 하늘을 보며 걸어내려오는데 입가에 맴도는 노랫말, 법정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 법회에서 인용하셨다는 바로
“눈이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서정주-
가 자연발생적으로 읊조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처럼 “눈이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야만 합니다. 이 진군하는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기 전에 말입니다.

https://youtube.com/watch?v=uNi_0Jkchmk&feature=share


오호, 짜라투스트라여, 여기는 대도시다. 그대는 여기에서 찾을 아무것도 없고 일체를 잃어버릴 뿐이다. 그대는 왜 이 흙탕 속으로 걸어가려 하는가? 부디 그대의 발을 측은히 생각하라. 도리어 도시의 문에 침을 뱉고 돌아서라!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