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변영로의 ‘봄비’에서
봄비가 “나즉하고 그윽하게” 나리는 3월의 마지막 주말에 늘 좋은 글과 함께 묵향을 듬뿍 선물하시는 블로그 이웃께서 ‘봄 비’라는 묵향과 함께 우리에게 ‘논개’라는 시로 잘 알려지신 수주 변영로(1898-1961) 선생님의 ‘봄비’라는 시를 보내주셨습니다.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까 하여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아, 미끄럽지 않은 곳에 미끄러져 그대와 나 사이엔 만리가 격했어라
다시 못 뵈올 그대의 고운 얼굴 사라지는 옛꿈보다도 희미하여라”
—변영로, ‘생시에 못 뵈올 님’
우리 문학사에서 변영로 시인은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조선 3대 ‘님’의 시인’이라 불리워 집니다. 우리 시대 서정시에서의 ‘님’은 사랑하는 연인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이 고난과 시련의 상황에 놓일 때 찾고자 했던 동경과 이상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제 치하에서 우리 시인들이 노래한 ‘님’은 ‘부재(不在)의 님’이고 대체로 상실된 주권을 상징했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럼 변영론의 ‘봄비’를 읽어보시겠습니다.(이 시가 실린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발음 그대로의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살려 서정적 사실성을 부각하고 있다.)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러운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봄비 / 변영로 <신생활> 2호, 1922.3
변영로의 이 시는 1920년대 전반기 한국 서정시의 정상을 보여 줍니다. 우리 문학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은 시 ‘봄비’를 변영로에게도 기념비적이지만, 우리 시사에서도 기념비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민족애와 서정적 정취를 잘 버무린 그의 <논개>와는 달리 이 작품은 봄비의 고요하고 잔잔한 시정(詩情)을 세련되고 섬세한 시어로써 유려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봄비가, <황무지>의 시인 T. S. 앨리어트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것 처럼 만물을 일깨우지만, “근심같이” 내린다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의 당시의 희망을 조국의 상실한 좌절과 암담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둘째 연 마지막 행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은 시적 화자가 ‘님’에 대한 회상에 빠짐으로 현실의 ‘님’의 부재(不在)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지요. 그러므로 임을 상실한 슬픔이 증폭되어 물리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도 가슴이 애려오는 육체적인 통증으로 느껴지는 것이 겠지요.
그리고 마지막 연 마지막 싯구 “아, 안 올 사람 기두리는 나의 마음”은 기약없는 주권의 회복이나 무망(無望)한 독립에 대한 시인의 상황적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심정적으로는 ‘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립니다. 현실적으로는 비록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감성적으로는 오지 않을 그 희망을 “나즉하고 그윽하게” 묵묵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 위를
향기로운 자랑 앞에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나즉하고 그윽하게
나리누나”
— 변영로, ‘봄비’ 가운데
봄비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비가 아무리 “근심같이” 내려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마음>에 실린 또 다른 시 ‘오, 나의 영혼 기(旗)여’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나의 영혼의 기(旗)여/ 펄넝거려라, 오, 펄넝거려라,/ 나의 령혼의 기(旗)여, 펄넝거려라- /산에서나, 바다에서나! 영원히 조바슴하는 나의 기(旗)여!/ 비마즌 버들이 너의 아름다움이 안이며,/ 종용(從容)히 달닌 기독(基督)의 수난(受難)이 너의 운명(運命)이 안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럼, 박목월의 “슬픈 꿈처럼” 봄비 흠뻑 먹은 희망의 노래(시) 두 편(박목월과 이수복 시인의 ‘봄비’)을 이미지와 같이 읽으시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늘 고독 속에평안하시길...
https://youtube.com/watch?v=UKpaYjCsYWA&feature=share
https://youtube.com/watch?v=2fRv3YXVK3k&feature=share
https://youtube.com/watch?v=VrbgbL-iIOY&feature=share